절망(絶望)의 길목에 섰을 때
- 작성일
- 2013.01.14 18:44
- 등록자
- 이형문
- 조회수
- 1655
인간은 누구나 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자기 홀로 눈물을 삼켜온 세월이 있습니다.
고난(苦難)과 절망(絶望)의 길목에서 홀로 방황(彷徨)하고 좌절(挫折)하며 또한 극기(克己)하는 과정을 겪기 마련이지요. 그 절망의 과정을 넘어설 때마다 인생을 다시 새로운 각오(覺悟)로 생각하고 단련하며 다시 시작한다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경우에 따라 남의 조언을 얻을 때도 있고 곁에 가장 가까운 동반자(同伴者)의 절실한 조언과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 동반자를 얻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그 절망의 과정이란 모든 삶들이 날이면 날마다 모진 아픔을 견디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고통의 지난날이 참으로 그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날들이었는지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지요. 그것은 지우개로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울 수도 없는 자신의 일기장처럼 빼곡하게 남게 됩니다. 그것이 자신이 살아갈 앞날에 밑거름이 되지요.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 20~40대 젊은이들이 하루 평균 43명 꼴로 자살을 한다는 뉴스를 보면서 자기가 바라던 일이 이뤄지지 않은데 비관하고 쉽게 세상을 포기하며 좌절감에서 무기력하게 낙심해버리는 안타까운 현실을 직시하면서 필자는 아픔을 금할 수 없습니다.
과거 50~60년 전의 필자가 살아오던 청소년 시절에는 하루의 호구지책(糊口之策)이 어려워 굶다 못해 모진 목숨 자살하는 경우가 대다수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행어로 자고 난 후 인사가 “밤새 잘 주무셨습니까?” 라고 했지요.
그러나 지금 현대 세상에는 없는 물자(物資)가 없고 자신의 노력으로 얼마든지 즐겁고 멋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밥을 굶어 자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현실과 하던 목표의 일이 잘 되지 않고 실패했다는 단순한 이유로 남들은 다 잘 사는데 나만 왜 이러는가? 라고 더 위축되어 좌절감(挫折感)속에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아까운 목숨을 끊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그것은 호사스러운 부모슬하에서 고생 없이 자라오다가 세상 밖에 나가 뭐든지 쉽게 성공할 수 있다는 막연하고 단순한 생각만으로 어떤 위기의식(危機意識)을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그 잘못은 그저 내 새끼만이 제일이라고 오냐오냐 기르다가 막상 세상에 내보내며 자력으로 돈 없이 고생하며 인내시키는 극기의 정신을 전혀 가르치지 못한 부모님들의 큰 잘못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어렵게 부모의 덕으로 대학을 나와 있는 고급 실업자 수가 무려 2백만 명이 넘을 정도로 방황하고 넘쳐있는 이들이 바로 가장 위험한 자살 대기자들이 틀림없습니다. 학력은 높고 할 것은 마땅찮고 자존심은 목까지 꽉 차 있어 무너지고 싶지 않고 남 앞에 나가기도 뭐하고 돈 벌기도 어렵다보니 차마 얼굴에 철판을 깔지 못해 이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젊은이들은 이제 그런 자존심(自尊心)같은 것, 헌 신짝처럼 다 벗어 던져보십시오. 앞이 훤히 내려다 보일 것입니다. 밑바닥 일자리는 얼마든지 눈앞에 널려있습니다. 나는 그런 일 절대할 수 없다구요? 그건 정신 못 차린 배부른 소립니다.
필자가 젊은 시절 대학을 졸업하고 중고등학교 교직생활과 대한석유공사 직매소 부장직책까지 한 후 독립해 사업해볼 계획으로 잘 나가던 때 나의 약점인 귀가 엷어 남의 보증을 여러 곳에 서 줘 그로 인한 집안이 압류를 수없이 당해 풍비박살(風痱搏殺)나 식구가 길거리에 앉아야하는 때를 수없이 겪으면서 그 어려운 과정을 딛고 오뚝이처럼 일어섰던 산 경험자입니다.
필자가 서울에 살 때 하루살이 일자리로 서울 남대문 새벽 인력시장이나 청량리 맘모스 백화점 앞 시장바닥 인력시장, 서울 영등포 당산동 인력시장 등지에 팔려나가 땀 흘려 일했고, 심지어 노동판에서 임금이 높은 일본에 오사카 이꾸노꾸에 소재한 텐노지와 쓰루하시 인력시장이나 동경(東京)의 어시장 쓰끼지 인력시장에서 일했고, 특히 일본에서는 산재보험이 적용되지 못해 건설현장에서 사고에 대비해 요령껏 일해야 하는데 일본에서는 주로 남이 자는 한밤중에서 새벽까지 일을 많이 합니다. 일본에서는 주급으로 계산을 하지만 한국보다 임금이 배로 많습니다. 제일 어려운 일을 해본 기억으로는 서울 한강 하수구 지하 폐수 펌프처리장에서 서울사람들이 누운 똥(糞)내음을 지겹도록 맡으며 1년여를 일해 본 기억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절망의 길목에 섰을 때 자신이 악착같이 일어서겠다는 각오와 정신만 서면 절대 놀지 않고 얼마든지 일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고급 실업자들의 정신을 개조(改造)치 않는 한 자살자는 더 늘어 날것입니다.
일본의 경우 성년식(成年式)이 끝나는 이후부터는 자식의 장래를 위해 단돈 일만 원도 반드시 빌려주고 받는 정신을 길러 자력으로 성장하도록 하지요. 그러나 우리나라같이 부자유친(父子有親)관계로 자식이 다 커서 결혼시켜 주고 집, 사업자금까지 결국 자식 위해 부모가 마지막에는 빈 털털이가 되어 노숙자신세로 전락되어 버려도 우리나라 자식들은 그 고마움을 모르고 부모를 길거리로, 양로원으로 보내버리는 한심한 현실입니다. 진지한 고생과 눈물을 흘려본 자식이라야 부모의 고마움을 알 터인데 그러지 못한 우리의 현실을 개탄해 볼 뿐입니다.
자신이 방황하고 괴로우며 세상에 시달릴 때 신앙생활은 참 좋은 위안과 안정을 줍니다. 그런 젊은이들에게 안정의 마음을 가다듬는 위로의 주님을 바라보는 "찬송가" 를 불러보십시오. “세상에 시달릴 때 위로의 주(主)를 보라. 내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라는 생명 샘이 되는 하나님 말씀으로 자신의 자존심 다 버리고 무릎 꿇어보십시오. 그러면 절망의 길목에서 다 해결됩니다.
고난(苦難)과 절망(絶望)의 길목에서 홀로 방황(彷徨)하고 좌절(挫折)하며 또한 극기(克己)하는 과정을 겪기 마련이지요. 그 절망의 과정을 넘어설 때마다 인생을 다시 새로운 각오(覺悟)로 생각하고 단련하며 다시 시작한다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경우에 따라 남의 조언을 얻을 때도 있고 곁에 가장 가까운 동반자(同伴者)의 절실한 조언과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 동반자를 얻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그 절망의 과정이란 모든 삶들이 날이면 날마다 모진 아픔을 견디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고통의 지난날이 참으로 그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날들이었는지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지요. 그것은 지우개로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울 수도 없는 자신의 일기장처럼 빼곡하게 남게 됩니다. 그것이 자신이 살아갈 앞날에 밑거름이 되지요.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 20~40대 젊은이들이 하루 평균 43명 꼴로 자살을 한다는 뉴스를 보면서 자기가 바라던 일이 이뤄지지 않은데 비관하고 쉽게 세상을 포기하며 좌절감에서 무기력하게 낙심해버리는 안타까운 현실을 직시하면서 필자는 아픔을 금할 수 없습니다.
과거 50~60년 전의 필자가 살아오던 청소년 시절에는 하루의 호구지책(糊口之策)이 어려워 굶다 못해 모진 목숨 자살하는 경우가 대다수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행어로 자고 난 후 인사가 “밤새 잘 주무셨습니까?” 라고 했지요.
그러나 지금 현대 세상에는 없는 물자(物資)가 없고 자신의 노력으로 얼마든지 즐겁고 멋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밥을 굶어 자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현실과 하던 목표의 일이 잘 되지 않고 실패했다는 단순한 이유로 남들은 다 잘 사는데 나만 왜 이러는가? 라고 더 위축되어 좌절감(挫折感)속에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아까운 목숨을 끊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그것은 호사스러운 부모슬하에서 고생 없이 자라오다가 세상 밖에 나가 뭐든지 쉽게 성공할 수 있다는 막연하고 단순한 생각만으로 어떤 위기의식(危機意識)을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그 잘못은 그저 내 새끼만이 제일이라고 오냐오냐 기르다가 막상 세상에 내보내며 자력으로 돈 없이 고생하며 인내시키는 극기의 정신을 전혀 가르치지 못한 부모님들의 큰 잘못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어렵게 부모의 덕으로 대학을 나와 있는 고급 실업자 수가 무려 2백만 명이 넘을 정도로 방황하고 넘쳐있는 이들이 바로 가장 위험한 자살 대기자들이 틀림없습니다. 학력은 높고 할 것은 마땅찮고 자존심은 목까지 꽉 차 있어 무너지고 싶지 않고 남 앞에 나가기도 뭐하고 돈 벌기도 어렵다보니 차마 얼굴에 철판을 깔지 못해 이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젊은이들은 이제 그런 자존심(自尊心)같은 것, 헌 신짝처럼 다 벗어 던져보십시오. 앞이 훤히 내려다 보일 것입니다. 밑바닥 일자리는 얼마든지 눈앞에 널려있습니다. 나는 그런 일 절대할 수 없다구요? 그건 정신 못 차린 배부른 소립니다.
필자가 젊은 시절 대학을 졸업하고 중고등학교 교직생활과 대한석유공사 직매소 부장직책까지 한 후 독립해 사업해볼 계획으로 잘 나가던 때 나의 약점인 귀가 엷어 남의 보증을 여러 곳에 서 줘 그로 인한 집안이 압류를 수없이 당해 풍비박살(風痱搏殺)나 식구가 길거리에 앉아야하는 때를 수없이 겪으면서 그 어려운 과정을 딛고 오뚝이처럼 일어섰던 산 경험자입니다.
필자가 서울에 살 때 하루살이 일자리로 서울 남대문 새벽 인력시장이나 청량리 맘모스 백화점 앞 시장바닥 인력시장, 서울 영등포 당산동 인력시장 등지에 팔려나가 땀 흘려 일했고, 심지어 노동판에서 임금이 높은 일본에 오사카 이꾸노꾸에 소재한 텐노지와 쓰루하시 인력시장이나 동경(東京)의 어시장 쓰끼지 인력시장에서 일했고, 특히 일본에서는 산재보험이 적용되지 못해 건설현장에서 사고에 대비해 요령껏 일해야 하는데 일본에서는 주로 남이 자는 한밤중에서 새벽까지 일을 많이 합니다. 일본에서는 주급으로 계산을 하지만 한국보다 임금이 배로 많습니다. 제일 어려운 일을 해본 기억으로는 서울 한강 하수구 지하 폐수 펌프처리장에서 서울사람들이 누운 똥(糞)내음을 지겹도록 맡으며 1년여를 일해 본 기억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절망의 길목에 섰을 때 자신이 악착같이 일어서겠다는 각오와 정신만 서면 절대 놀지 않고 얼마든지 일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고급 실업자들의 정신을 개조(改造)치 않는 한 자살자는 더 늘어 날것입니다.
일본의 경우 성년식(成年式)이 끝나는 이후부터는 자식의 장래를 위해 단돈 일만 원도 반드시 빌려주고 받는 정신을 길러 자력으로 성장하도록 하지요. 그러나 우리나라같이 부자유친(父子有親)관계로 자식이 다 커서 결혼시켜 주고 집, 사업자금까지 결국 자식 위해 부모가 마지막에는 빈 털털이가 되어 노숙자신세로 전락되어 버려도 우리나라 자식들은 그 고마움을 모르고 부모를 길거리로, 양로원으로 보내버리는 한심한 현실입니다. 진지한 고생과 눈물을 흘려본 자식이라야 부모의 고마움을 알 터인데 그러지 못한 우리의 현실을 개탄해 볼 뿐입니다.
자신이 방황하고 괴로우며 세상에 시달릴 때 신앙생활은 참 좋은 위안과 안정을 줍니다. 그런 젊은이들에게 안정의 마음을 가다듬는 위로의 주님을 바라보는 "찬송가" 를 불러보십시오. “세상에 시달릴 때 위로의 주(主)를 보라. 내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라는 생명 샘이 되는 하나님 말씀으로 자신의 자존심 다 버리고 무릎 꿇어보십시오. 그러면 절망의 길목에서 다 해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