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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낙화하고 큰가마에 불이 들어가고, 장차 큰 장사꾼이 되어 배고픈 이들을 돕겠다는 궁복.... 드디어 그가 장보고로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가 봄바람처럼 따사롭습니다.
절정으로 치닫는 봄날, 궁복이 보고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4회를 단숨에 읽었다.지도자로서 넉넉한 인품을 지닌 정 족장은 한 번쯤 만나고 싶어지는 사람이다.보고는 재물을 지킨다는 의미를 가진 이름이기에 사람을 보는 정 족장의 혜안을 다시 생각해 본다.4회를 읽고 정수사에도 꼭 한 번 가보고 싶어졌다.
내마음에도 얼른 봄이 찾아오길 바랍니다 좋은 이야기 감사합니다
큰장사꾼이 되어 인근에 배고픈 양민들을 챙기고자한 어여쁜 마음이 읽혀집니다 이름도 재물을 지킨다는 "보고"라는 이름이 생기도 ~~ 앞으로 보고와 정족장 그리고 정년이와의 얽혀지는 이야기가 흥미롭게 기대됩니다
남도에 봄이 찾아 왔습니다산수유꽃 생강꽃 홍매화 청매화 동백꽃 그리고 수 많은 작고 귀여움이 있는 꽃들도 지찬입니다.아름다운 #남도답사1번지 강진입니다그리고 아름다운 사찰 정수사를 만났습니다.나홀로 청년 궁복이 큰 꿈을 품고 있더니 청해(깨끗한 바다)를 위하여 이름도 장보고로 지었습니다.선생님 좋은 날 되십시오%%%%%% 정 수 사 %%%%%%강진군 대구면사당리에서 동북쪽으로 3㎞ 정도 들어가면 운곡마을이 있고 그 뒤 천태산 계곡에 정수사가 있다. 정수사에서 전해 오는 사적기에 따르면 애장왕 1년(800)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지만 도선은 흥덕왕 2년(827)에 태어났으므로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절 이름은 처음에 쌍계사였다가 조선 현종 6년(1665)에 정수사로 바뀌었다고 한다. 위치로 보아 고려청자 가마들과 어떠한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아쉽게도 고려 시대의 사적은 전해지지 않는다.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정유재란 때 큰 피해를 입었는데 그 앞뒤로 네 차례에 걸쳐 중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정조 때는 고금도에 있는 관왕묘(관우를 모신 묘당)를 관리하는 절로 지정되었고 그 대가로 승려들이 모든 잡역을 면제받았다. 그 이래 절의 재정이 넉넉해져서 22개나 되는 암자를 거느리는 큰 절이 되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퇴락했다. 지금 볼 수 있는 것은 한국전쟁 때 불에 탄 후 복구된 모습이다.지금 정수사는 대웅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61호)과 나한전, 요사채만이 나란히 있는 작은 절이지만 그 앞에 여러 단의 석축이 남아 있어서 예전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이 절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에 다포식 건물인데 소박하지만 짜임새가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정수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5 - 전남, 초판 1995., 23쇄 2010.,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신미원, 김성철, 유홍준)https://blog.naver.com/kbh0403/222912101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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