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이야기> 모란꽃 소년
- 작성일
- 2009.08.26 12:08
- 등록자
- 이홍규
- 조회수
- 1453
백금포에 수많은 배들이 정박해 있다. 고기를 다득싣고 배들이 들어오면 백금포는 좋은 고기를 사려고 온 장사들로 인해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쌀을 커다란 배에 옮겨싣는 아저씨들이 빠쁘게 이마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영랑은 부두가에서 아버지께서 장부에 쌀의 숫자를 기록하고 계신 것을 옆에서 바라보고 있다. 영랑의 아버지는 강진에서 나오는 쌀을 일본으로 싣고가서 판매를 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일곱 살의 어린 영랑의 손을잡고 아버지는 하시는 일을 보여 주시고 자세히 설명해 주신다. 아직 영랑은 아버지의 말씀이 이해는 안가지만 아버지가 하시는 일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영랑의 아버지는 중국의 만주와 상해에서 장사를 하셨다. 처음에 상해로 갔을때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서 부두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고생을 이기며 열심히 일을 하였다. 중국의 상해는 중국에서 가장큰 항구도시 로서 외국과 무역을 하기 때문에 많은 화물을 배에서 내리고 싣는 일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평상시 아주 성실히 일을 하는 모습을 본 사장은 영랑의 아버지를 곁에 두고 화물을 관리하는 일을 맡겼다. 상해항에서 열심히 일한 덕에 돈을벌고 장사밑천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래서 상해항에 들어온 좋은 물건을 구입하여 만주에 가서 판매하는 장사를 시작했다. 만주에서의 장사는 아주 잘되어 대박을 터트렸다. 만주는 내륙 깊숙이 위치하고 있어서 외국사의 교역이 없어서 생활에 필요한 물건이 아주 귀했다. 그대신에 쌀이 많이 생산되어 쌀을 사다가 상해에서 판매를 해서 영랑의 아버지는 돈을 많이 벌었다.
장사를 통해 번 돈을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에 기부하여 독립운동을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당시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중국과 아시아 지역을 일본이 침략하여 일본의 억압을 받고있을 때다. 그래서 상해임시정부는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노력을 하였다.
상해에 온지 13년이 흘러 고향에 계신 부모님 생각에 항상 마음 편할날이 없었던 영랑의 아버지는 상해의 모든 상점과 물건을 처분하고 고향인 전남 강진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와 결혼을 하고 강진읍의 드넓은 논을 200마지기 샀다. 논 200마지기의 면적은 강진읍에 있는 모든 논을 다 합한면적 이었다. 강진에서 가장 논이 많은 부농이 되었다. 논을 농부들에게 빌려 주고 가을에 곡식으로 받는 소작을 했다. 풍년이 들어 수확이 많을때는 소작을 많이 받고 흉년이 들어 수확이 적을때는 소작를 않받고 면제해 주었다. 그리고 흉년으로 인해 밥을 못먹는 사람들을 도와 주는 좋은 일을 많이 했다.
결혼후 일년이 지나고 영랑이 태어났다. 영랑의 어머니는 항상 검소하셔서 직접 농사일도 하고 집안살림을 알뜰하게 하셨다. 영랑의 외가는 대대로 한학을 하는 학자의 집안 으로서 외할아버지는 동성리에서 서당을 하고 있다. 그래서 영랑은 다섯 살이 되자 날마다 외할아버지 계시는 서당에 가서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서당에는 또래의 친구들과 형들이 있어서 공부가 끝나면 재기차기,자치기,말뚝박기 등 재미있는 놀이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오늘은 서당이 쉬는날 이라서 아버지가 일하사는 백금포에 나왔다. 아버지는 영랑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을 하셨다. “영랑아 너는 나중에 커서 어른이 되면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어려운 우리 민족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되거라. 그리고 넓은 세상으로 나가 우리민족의 기개를 펼치거라.” “아버지 오늘 싣은 쌀은 어디로 가나요?” “오늘 배에 싣은 쌀은 함경도 나진항으로 간단다. 그곳에서 쌀 도매상들이 쌀을 구입한단다. 아버지가 없는 동안에도 어머니와 동생을 잘 돌보거라. 아버지가 없을 때에는 네가 아버지를 대신해야 한다“
영랑의 아버지는 말씀을 마치시고 배웅나온 어머니,할머니께 작별 인사를 하고 배에 올랐다. 배웅나온 영랑의 가족들은 무사히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었다. 배는 고동소리를 울리고 힘찬 물살을 가르며 백금포항에서 멀어져 갔다.
아버지의 배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영랑은 할아버지가 계시는 방에 들어갔다. 할아버지는 일주일 전부터 몸이 아프셔서 누워 계셨다. “할아버지 아버지 배웅하고 돌아왔습니다.
몸는 어떠세요?“ 할아버지는 영랑의 손을 잡으셨다. ”내손자 영랑이 왔구나. 네가 이렇게 커서 아버지 배웅을 하고 오고, 기특하구나“ ”할아버지 빨리 일어나세요. 다 나으시면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를 들려 주세요.“ ”오냐 알았다.“ 영랑은 할아버지의 팔과 다리를 주물러
드리며 할아버지가 빨리 낫기를 바랬다.
영랑의 집에는 봄이면 뜰안에 꽃향기가 가득 하다. 돌담옆에는 매화꽃이 피고, 장독대 옆에는 노오란 개나리가 피고, 울밑에는 모란꽃이 화사하게 피어 봄바람에 꽃향기 날리니 벌과 나비들이 놀러온다. 영랑은 활짝핀 모란꽃의 향기를 맡아보며 꽃을 만지면서 하얀나비들과 금새 친구가 되었다.
마루에 앉아 봄해살이 잔잔히 부서지는 돌담을 바라보니 담쟁이 덩굴이 더욱 푸른색으로 변했다. 집뒤의 대나무 숲에서 불어온 바람에 매화꽃잎에 하나,들씩 떨어지면 영랑은 왠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어린소년의 마음을 더욱 쓸쓸하게 한 것은 화사한게 온집안을 향기로 가득채우던 모란꽃이 오월의 마지막 날에 꽃잎이 시들어 가는 모습이다. 올봄에 피었던 모란꽃이 지면 또 삼백예순날을 기다려야 하는 생각을 하니 모란꽃의 모습이 처량 하기만 하였다.
쌀장사를 가셨던 아비지가 돌아 오시던날 바람에 아카시아 꽃이 눈처럼 날리며 영랑의 집에
까지 꽃향기와 꽃잎이 날아왔다. 서당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집안은 온통 울움바다가 되어 있었다. 할아버지의 방으로 달려가니 할아버지는 병풍뒤로 몸을 숨기시고
영정앞에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순간 영랑의 눈가에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울움보가 터지고 영랑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에 대한 슬픔을 참을수가 없었다. 유난히 영랑을 구여워 해주시고, 영랑의 손을잡고 산과 들로 다니면서 이름모를 풀과 꽃들의 이야기를 들려 주시며, 영랑의 마음속에 꿈을 심어 주셨다. 집안에는 조문을 온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슬픔의 눈물을 흘리고 갔다. 할아버지 께서는 생전에 동네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 주고 어린아이들을 귀여워 해주셨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더욱 슬펐다. 하얀 종이꽃을 꽂은 상여가 아카시아 꽃잎이 휘날리는 보은산길을 따라 떠나갔다. 한번가면 다시못을 기약없는 먼길을 할아버지는 떠나가셨다.할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영영 할아버지를 만날 수 없다는 생각이 더욱 영랑을 슬프게 했다.
할아버지를 떠나 보내고 영랑의 집은 다시금 평온함을 되 찾았다. 안채의 마루에 앉아 우두커니 처마끝 먼하늘을 바라보는 영랑의 눈앞에 새하얀 목련이 고운자태를 보이며 &47750;개 안남은 꽃잎이 오월의 끝자락을 아쉬워 하고 있다. 그때 밖에서 “영랑아 집에 있니?” 가장 절친한 친구 현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현구야 나 집에 있어” 영랑은 대문을 열며 현구를 맞이 했어요. “영랑아 우리 놀러가자” “어디로?” “탐진강 뚝길을 따라 남포항 포구에 가자” 영랑과 현구는 들판길을 걸어 드넓은 목리평야를 지나 강뚝에 도착했다. 강뚝에는 하얀 클로버가 강바람에 꽃물결을 이루고 있다. 현구는 흐르는 탐진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영랑아 강물이 몹시도 푸르지. 이물결이 흘러가면 드넓은 바다로 가겠지? 나도 커서 저 먼바다로 나갈꺼야 ” “야 우리 현구가 드넓은 바다로 나간다고 하니 대견스럽구나. 그때 나도 큰배에 태워줄꺼지?” “그래 우리는 친구니까”
강뚝에 앉아 멀리 고깃배들이 오가고 물새들이 창공을 날아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강가에서 고기를 낚는 긴수염의 할아버지와 고기그물을 손질하는 어부 아저씨, 강뚝에서 봄나물을 캐는 동네처녀들의 모습이 무척 정겨워 보였다. 강가의 갈대밭에는 새파란 갈대가 바람에 흔들거리고 작은 새들이 날아와 쉬었다 가곤 하였다.
남포항구에 도착하니 멸치잡이 배가 도착하여 어부들은 멸치상자를 운반하며 항구는 정말로
빠쁘게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가득했다. 남포항은 강진근의 바다에서 잡아온 물고기와 멸치를 매일 상인들이 사가는 곳이다. 특히 멸치로 젓갈을 담아 강진,장흥,해남,완도,진도 등으로 판매를 한다. 영랑과 현구는 남포항에서 갈매들과 함께 놀았다. 갈매기들은 어부들이 남긴 물고기를 주워먹기 위해 해질 무렵 이면 남포항에 찾아 왔다. 현구는 가져온 연필로 작은 수첩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남포항의 모습을 시로 써서 영랑에게 보여 주었다. 영랑은 현구가 써준 시를 보면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듬해 영랑이 야덟살이 되자 영랑은 강진읍에 있는 소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현구도 소학교 1학년 같은반이 되었다. 학교에 가서 교실에 앉아 있으니, 긴칼을 찬 일본선생이 들어와 일본말로 공부를 가르쳤다. 영랑과 현구는 일본어로 수업을 받는 것이 무척 싫었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길에 개울가에서 앉아서 영랑과 현구는 푸념을 했다. “현구야 우리는 조선사람 인데 왜 일본말을 배우하는지 모르겠다. 나 학교에 다니기 싫다.” 현구도 영랑의 말의 동감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조선의 말과 글을 놔두고 왜놈들의 말과글을 배우는 것이 정말 싫다.” 비록 여덟살의 어린이 였지만 영랑과 현구는 우리말과 글을 쓸 수 없는 현실에 가슴이 아팠다.
영랑은 현구와 함께 집에 돌아와 서재에 꽂혀져 있는 우리글로 씌여진 책을 읽었다. 책한권을 꺼내 읽었는데, 김소월의 시집 이었다. 영랑은 김소월의 시집을 읽고또 읽으며 시의의미를 깨닫기 시작했다. 현구는 심훈의 상록수를 읽으며 많은 눈물을 흘렸다. 영랑의 아버지가 책읽는 것을 좋아하셔서 외지로 쌀장사 갔다오시면 책 한권씩 사오셨다.
현구는 영랑의 집에오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참 좋았다. 하루는 영랑의 아버지가 일찍 들어오셔서 영랑과 현구를 불러놓고 말씀을 하셨다. “너희들이 지금 왜놈들 밑에서 왜놈들의 말과 글을 배우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분명히 조선사람 이다. 조선이 왜놈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국이 될 때까지 너희는 힘을 길러야 한다. 부지런히 지식을 배우고 익혀서 나중에 조선을 되찾는데 기여하는 사람이 되거라” 현구는 영랑의 아버지로부터 많은 감명을 받았다. 영랑의 아버지는 장사를 해서 번돈을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데 사용하고 소작을 하는 농민들의 어려움을 함께하는 사람 이었다.
영랑과 현구가 소학교 1학년을 마치고 겨울방학을 맞이 했다. 영랑은 방학이라서 집에만 있기가 심심해서 교촌리에 있는 현구를 찾아 갔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오백년된 커다란 느티나무가 거친바람을 말없이 막아주고 있었다. 느티나무옆 정자에 앉아 홀로 생각에 잠겨있는 현구의 곁으로 다가서 살며서 현구의 두눈을 손으로 가렸다. “어 누구야? 누가 내눈을 두손으로 가려?“ ”누구게 알아 맞춰봐“ ”영랑 이구나 난 누구라고“ 현구는 영랑이 자기 동네에 놀러와서 무척 반가웠다.
“영랑아 이따 야학에 가지 않겠니?” “야학 거기가 뭐하는 곳인데?” “예배당에서 밤에 한글도 가르쳐 주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해준다고 하더구나 한번 가보자” “그래” 현구는 영랑을 데리고 예배당으로 갔다. 예배당에는 동네의 누나들과 형들도 있었고, 아저씨와 아주머니들도 있었다. 당시의 농촌은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서 문맹퇴치와 민족계몽운동이 전국에서 활발하게 일어났다. 강진에서도 예배당의 전도사님과 뜻있는 분들이 야학을 열어 한글을 가르치는 교육을 실시 했다.
전도사님은 한글의 기초와 한글성경을 읽고 쓰는법을 가르쳤다.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는 ‘정용철“이라는 분이 담당 했다. 정용철 선생님은 서울에서 학교를 나오시고 고향에 내려와서 고향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다. 영랑이 앉은자리 바로 옆에는 동성리 우물옆에 사는 혜숙이와 같은동네 미숙이가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영랑은 혜숙이와 미숙이에게 반가운 인사를 했습니다. 혜숙이와 미숙이는 수줍워 했다. 당시에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기 함께 어울려 놀지 못했다. 엄격한 유교문화가 팽배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정용철 선생님은 우리민족의 역사에 대해서 재밌게 이야기 했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이야기와 중원대륙에 영토를 확장한 광개토대왕의 이야기는 시간 가는줄 모르게 했다.
그리고 신라의 향가와 고려가요,시조를 읽어 주시며,민족정신을 심어 주셨다. 영랑과 현구는 선생님이 가르쳐준 고대시가를 공책에 잘 적었다. 전도사님은 예수님의 이야기와 애굽에서 민족을 이끌어낸 모세의 이야기도 재미있게 들려 주었다.
영랑은 야학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서 선생님이 가르쳐준 시를 읽르면서 갔다. 집에 도착해서도 시를 외워보기도 했다. 다음날 학당에 가서 현구는 공책에 직접쓴 동시를 선생님께 보여드렸다.
정용철 선생님은 현구의 시를 보고 잘 썼다고 칭찬했다. “야 현구 너 시 정말 잘쓰구나
나중에 훌륭한 시인이 되겠는걸...“ 현구는 선생님이 자신이 사인이 소질이 있다고 하신 말씀에 너무나 즐거웠다.
야학에서 정용철 선생님과의 만남은 두 소년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 주었다. 영랑은 글을 쓰는것보다 책을 읽는 것이 마냥 좋았다.
현구는 소학교 2학년까지 다니고 더 이상 학교를 다닐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어렵게 농사를 지어서 가족들이 먹고 살기힘들고 현구 밑으로 동생이 세명이나 있어서 현구는 소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그래서 현구는 낮에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야학에서 열심히 공부를 했다. 야학에서는 책과 공책과 연필을 학생들에게 그냥 나누어주며 공부를 가르쳤다. 현구가 야학에 도착 했을 때 영랑의 아버지가 선생님과 말씀을 마치고 돌아가시다 현구와 마주쳤다. “이게 누구야. 현구 아니냐. 현구 잘지내고 있지? 요즘 집에도 놀러 안오고. 자주 놀러 오너라. 현구야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열심히 공부해라” 현구의 어깨를 어루만지시며 밖으로 나가셨다. 영랑의 아버지께서 그동안 남몰래 야학의 운영비를 후원해 주셨다.
영랑은 소학교 6학년 졸업반이 되었다. 부모님은 영랑의 진로문제로 많은 고민을 하셨다. 강진에는 보통학교가 없어서 객지로 유학을 보내야 하는데 어린아들을 혼자 보내는 것이 무척 걱정이 되었다.
영랑의 아버지는 정용철 선생님을 찾아갔다. “정선생님 상의 드릴것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무슨일 이신가요?” “다름이 아니라 제 아들 영랑이가 소학교 졸업이 얼마 안남았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를 상급학교에 진학 시켜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선생님께 의논 드리려고 왔습니다. 서울에는 친척이 아무도 없어서 하숙을 시켜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걱정이 됩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다 들은 정용철 선생님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영랑이 아버님 ! 영랑이를 서울로 유학 보내십시오. 영랑이의 미래를 위해서는
지금은 힘들더라도 넓은 서울에서 공부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숙집은 제가 예전에 서울서 학교다니며 하숙하던 곳이 있으니 그곳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정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