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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여행후기

길 위에서 길을 묻다 -茶山草堂

작성일
2020.09.04 13:55
등록자
정인오
조회수
360
4-1 다산초당 가는길.jpeg
4-2 뿌리의 길.jpeg
4-4연지석가산.jpg
4-5 정조의 한강 배다리 행차.jpg
4-6 공고.jpeg
길 위에서
내 갈 길이 이 길이냐고 묻고 싶었다.
끌어주는 손길과 밀어주는 발길
이 길이 그 길이냐고 묻고 싶었다.
사람에서 시작하여 사람에게 닿는
사람의 길을 찾고 싶었다.

완도와 진도에서 모두 6일간을 죽친 후 다시 길을 떠났다.
‘겨울에 시냇물을 건너듯이 신중하고(與),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猶)’는 뜻에서 자신의 호를 ‘여유당’이라고 지었다. 하지만 이런 멋진 여유당(與猶堂)이란 호를 버리고 정약용(丁若鏞)은 ‘다산(茶山)’이라는 호로 바꾸어 버렸다. 왜? 茶를 너무 좋아해서?

초당으로 올라가는 길이 너무 좋다. 300m에 달하는 적당히 가파른 길이었지만 일부러 늑장을 부리며 올라갈 만큼 길에서 그의 숨결이 느껴지고 있었다. 내가 헉헉거리듯이 그도 헉헉거렸을 것이고, 내가 이리 저리 돌뿌리를 피했듯이 그도 이리저리 돌뿌리를 헤치며 올라갔을 그 길이었다.
4-1 다산초당 가는 길

중간쯤에 오르자 소나무의 뿌리가 길에서 계단을 만들고 있었다.
4-2 뿌리의 길

빗물에 저절로 드러난 것일까? 지상의 바람과 햇볕이 그리운 것일까?
얼기설기 엉켜 드러난 소나무의 속살은 자신에게 영양분을 공급하고 생명을 다하고 떨어진 솔잎과 만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뿌리는 온갖 화음을 내며 자신에게 수분을 공급하던 계곡물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것 같다.
4-3 계곡물 동영상

초당은 작았다. 11년간 居하며 무려 500여 권의 장서를 출간하였던 이곳 조선시대 최고의 민영 출판사 茶山草堂은 기대보다 상상했던 것 보다 너무 작았다. 1958년 비교적 가까운 시기에 다시 지었다고는 하지만 그 조잡함이 그리고 그 옆에 있는 蓮池石假山의 초라함이 애처롭지만 이 때문에 더 좋았다.
4-4 연지석가산

그는 가히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버금가는 조선 500년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여행을 떠난 7일째에 비로소 나는 이 여행의 참뜻을 하나 느꼈다. 귀양살이 중에서 초당을 짓고, 제자들과 함께 經世濟民의 뜻을 펼쳤던 조선의 자랑스러운 만능프로페셔널 선비를 이곳에서 만날줄이야…

그는 고산 윤선도와도 연결이 된다. 윤씨 집안의 녹우당에 있는 만권당의 수많은 서적이 그의 천재성에 기여한 바가 크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도박을 즐겨했고, 진주 촉석루에서 기생들에게 3천전을 뿌린 기분파였다고 한다. 천주교 신자를 왔다 갔다 했고 추사 김정희의 펜팔 친구이자 정조의 술 친구이기도 한 그는 북한에서는 조선 최초의 공산주의자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젊은 날의 모습을 상상하며 내려오는 산길에서 못내 아쉬워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남양주에 있다는 그의 묘를 찾아가 술 한잔 올리고 싶다.

PS1. 유명한 그림 하나 소개한다. 한강에 배를 이어서 건너는 정조의 행차 모습이다. 이 배다리는 정약용의 작품이다. 6천명의 수행원과 1400필의 말이 舟橋를 건너가는 모습이 위풍당당하기 그지없다.


PS2. 사진을 뒤적이다 빠뜨린게 있어서...
초당 올라가는 길에서 본 진입로 정비사업 공고가 있었다.
초당은 초당보다 진입로가 너무 좋아서 방금 강진군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진입로 정비사업 적당히 하고 자연그대로 두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군정시책 제안을 했다.
이번 여행길에 지자체장들이 온갖 정비사업 하는 것 좋아해서 예산낭비하는 한 것을 너무 많이 봤던지라 걱정이 태산이다.



담당자
문화관광실 관광진흥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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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430-3313
최종업데이트
2024.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