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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여행후기

완향(玩香)의 미(美)를 찾아서, 금서당을 가다

작성일
2016.08.04 18:02
등록자
유헌
조회수
883
강진일보, 유헌 시인의 역사기행③


완향(玩香)의 미(美)를 찾아서
-김영렬, 이제 역사가 되다


휘어진 돌담길을 따라간다. 완만한 비탈길을 오르고 있다. 문득 고개를 드니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다. 마치 비오는 소리처럼 말이다. 울타리 안쪽의 오래된 은행나무가 나에게 인사말이라도 건네는 걸까. 잠시 고목을 올려다본다. 바람이 또 스치고 지나간다.

한여름 늦은 오후. 보은산 자락 금서당(琴書當) 가는 길은 호젓했다. 햇살도 희미했다. 그간 막연히 금서당이 어떤 화가와 관련된 집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직접 찾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영랑생가 돌담을 끼고 걷는다. 세계모란공원으로 가는 초입이기도 한 이 길을 조금 더 오르니 금서당으로 들어가는 돌계단이 나온다. 사람의 발길이 그리 닿지 않아서일까. 잡풀이 우거져 있다. 조금은 적막해 보인다.

강진 신교육의 발상지 금서당을 가다..

조심스레 금서당 안으로 들어선다. 잔디가 깔린 넓은 마당 한 편의 표지판은 이곳이 금서당의 옛터임을 알려주고 있다. 금서당은 1905년 사립 금릉학교로 문을 열었다고 한다. 강진 교육의 역사가 시작된 곳인 셈이다. 전교생 200여명이 1919년 4월 4일 독립만세를 외쳤던 역사의 현장이라는 것도 오늘 이곳에서 처음 알았다. 아래쪽에 살았던 영랑도 6살 때 금서당에 입학해 1909년 4년제 강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고 한다. 처음엔 사립이었지만 곧 공립 보통학교로 바뀌었나 보다. 그러고 보니 영랑 선생은 나의 초등하교 대선배님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서당은 나의 모교이기도 한 강진중앙초등학교의 전신이니까 말이다. 어디선가 거문고의 선율을 닮은 학동(學童)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금서당 주변을 살펴봤다. 수목이 울창하다. 겨울 동백 산다화도 보이고 향나무도 여러 그루가 있었다. 바나나 나무에서는 바나나가 노랗게 익어가고 있다. 정원에 치자향이 그윽하다.
산그늘이 내려앉은 금서당은 고즈넉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경천숭지애인(敬天崇地愛人)이라는 멋스런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하늘을 공경하고 땅을 숭상하며 사람을 사랑하라는 뜻일 게다. 한참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인기척이 들렸다. 금서당 마당 한쪽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순간 조금 긴장이 됐다. 다가가서 인사를 드렸더니 의외로 친절하게 맞아 주신다. 금서당 주인 박영숙 여사님이셨다. 이른 저녁을 드시고 계신 것 같았다. 2003년 완향 김영렬 선생이 작고하신 후 홀로 금서당을 지키고 있다고 하셨다. 그간 너무 외로우셨을까. 함께 간 김충경 시인과 수필가이신 김명희 강진군의회 부의장, 이래향 시인 등에게 지난 세월을 쏟아내셨다. 강진이 고향인 김충경 시인은 전라남도 문화예술과장과 전남문화예술재단 사무처장을 역임한 이력 때문인지 완향의 그림에 관심이 많았다.
금서당은 1950년 이후 완향 선생이 직접 구입하셨다고 했다. 그 당시 강진읍 목리에 사는 노부부의 대형 전신 초상화를 그려주고 논 한마지기 값을 받아 그 돈으로 금서당을 장만하셨다는 것이다. 사진이 귀할 때라 가능한 일이었을까. 초상화 값도 놀랍지만 그걸로 이처럼 넓고 아름다운 집을 살 수 있었다는 사실도 신기했다. 처음 5칸 중 2칸은 헐리고 없었지만 원형을 그대로 살려 벽돌조의 건물을 이어 붙였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붕이 서로 달랐다. 기와와 슬레이트로 말이다. 그런데도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완향의 미에 취하다..

완향 선생은 1923년 강진에서 출생하셨다. 일본에서 그림 공부하던 시절과 장흥에서 교편을 잡던 몇 년을 제외하곤 고향 강진을 떠난 적이 없다고 하셨다. 60여년 의 긴 시간 동안 이곳 금서당에서 그림과 서예, 서각 등 예술작업에 몰두하였다고 한다. 성요셉여자고등학교 미술교사로서 후학을 양성하는데도 남다른 열정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후대는 완향을 향토색 짙은 강진의 서정을 가장 잘 표현한 화가로 평가하고 있나 보다. 그만큼 완향은 고향을 사랑했고 강진의 산야를 즐겨 그렸다.
완향(玩香)이라는 그의 호가 의미하듯이 향기와 더불어 노는 선생의 금서당엔 어떤 그림들이 걸려 있을까. 갑자기 그게 궁금해졌다. 미망인인 박영숙 여사님께 조심스레 여쭤봤더니 선뜻 안내를 하시겠단다. 마당에서 금서당 현관으로 들어서려면 석등 옆 자그만 무지개다리를 건너야 한다. 홍교 아래로 물이 흐르고 금붕어들이 노닐고 있었다. 왼쪽에 완향 찻집이라는 서각이 걸려 있었지만 여사님께서는 찻집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고 하셨다. 혼자서 이 넓은 정원과 집을 관리하는데도 버거워 보였다. 뒤쪽 별채에 보관돼 있는 작품들이 상할까봐 날마다 높은 계단을 오르내리며 습기가 차지 않도록 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있다고도 하셨다.
거실에는 그림들이 빼곡했다. 벽마다 강진의 풍경과 산야가 낯익은 모습으로 걸려있다. 와 를 배경으로 한 그림에는 남도의 갯내가 그대로 묻어 있다. 등 강진의 산야는 또 어떤가. 꽃이 피고 낙엽이 지고 눈이 내리는 강진의 4계를 한눈에 다 볼 수 있도록 화폭에 담아 두었다. 황소를 그릴 때도 고향 바다가 배경이고 심지어 누드화에도 강진의 풍경이 들어있다. 옆방으로 들어서니 누드화에 서예를 접목한 작품도 있다. 참으로 독특한 구상이었다. 쇄락청허(灑落凊虛)라는 제목이 붙은 누드화의 주인공은 완향 선생의 제자라고 했다. 평소 선생을 존경해온 제자가 어느 날 스스로 모델 되기를 자처하며 스승의 작품으로 남기를 원하자, 선생은 순수한 그 마음에 화답이라도 하듯 12시간 동안 마음을 가다듬고 비운 후 작품을 시작했다고 한다. 스승과 제자의 아름다운 만남이 있었기에 후세에 길이 남을 명화의 탄생이 가능했을 것이다.
선생은 서예와 서각에까지 일가견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금서당 곳곳에 걸린 서각은 모두 선생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완향은 무엇보다 고향을 사랑했다. 120호 대형 누드화 역시 강진의 바다 가우도를 배경으로 깔고 있었다. 다산초당도 화폭에 담았고 다산 선생의 진영(眞影)도 그렸다. 작품들을 둘러보면서 한마디로 완향은 강진의 어제를 세밀히 기록한 역사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남달리 고향에 대한 집념이 강한 화가였던 것 같다. 강진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그린 작품들은 현장성이 매우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자동차를 개조해 현장에서 먹고 자며 그림을 그렸고, 그리다 만 그림은 다시 자동차에 싣고 가서 완성했다고 하니까 선생의 작품에서 현장을 떠난 덧칠은 찾아보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현장에는 어김없이 박영숙 여사가 있었다. 완향 선생 60년 그림 인생에서 박여사는 그림자 내조를 해온 곳으로 알려져 있다. 늘 동고동락하며 풍경 속을 함께 누볐으니 말이다. 미술평론가 김인환은 ‘완향의 작품세계는 담백하고 소박하다. 정일한 관조와 다소 고전적인 격조, 차분한 듯 하면서도 변화와 율동, 청아한 기품이 감돈다. 포근한 고향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고 평가한다. 서양화가인 완향의 작품에서 ‘동양적인 단순성과 함축미를 읽을 수 있다’고도 말한다.

문학, 음악, 미술의 삼각 문화벨트를 꿈꾸다..

강진의 모습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그러나 선생의 작품은 강진의 어제를 또렷하게 증언하고 있다. 문득 선생의 작품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진을 찾는 많은 관광객들에게도 강진의 갯가와 풍경을 자랑하고 싶어졌다. 날로 변하고 있는 강진의 옛 모습은 이랬었노라고 얘기하고 싶어졌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런 훌륭한 작품을 전시할 상설공간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예향 전남에는 많은 미술관이 있다. 공립 7개소와 사립 18개소 등 모두 25개 미술관이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가까운 보성에는 군립백민미술관이 있고 무안에는 오승우미술관, 영암에는 하정우미술관, 함평에도 군립미술관이 있다. 전국 군 단위 문화지수 1위인 강진에도 이런 미술관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 군립미술관을 건립하려면 많은 예산이 들어갈 것이다. 수익 구조를 따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 돈이 얼마 들어간다는 생각보다는 문화복지 차원으로 접근한다면 의외로 일이 쉽게 풀릴 지도 모르겠다. 이곳 금서당 주변에 미술관이 들어선다면 강진은 명실공히 예술의 도시로 떳떳하게 이름을 올리게 될 것이다. 문학과 음악, 미술의 3박자를 갖춘 예향 중의 예향으로 거듭날 것이다. 오감통 음악창작소와 영랑생가에다 군립완향미술관이 보태져 관광객들에게 고급 볼거리를 제공한다면 남도답사일번지 강진의 이름은 더욱 빛날 것이다. 세계모란공원 조성공사가 마무리되고 강진의 서정이 담긴 미술관까지 건립된다면 이곳 영랑생가를 중심으로 한 탑동 일대는 전국 어디에다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고급 문화벨트가 형성될 것이다.
좁은 공간에 쟁여 놓듯 걸어두고 벽에 세워둔 250여점 완향의 작품들을 보면서 한편으론 걱정이 앞섰다. 개인이 관리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언제쯤 빛을 볼 수 있을까. 강진의 옛 모습들이 다시 세상 밖으로 걸어 나와 조명을 받을 날은 언제쯤일까. 완향의 거실을 나오면서 조금은 마음이 무거웠다.

금서당 언덕에 서니 저 멀리 구강포구가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강진만의 파도소리가 철썩 처얼썩 들리는 듯하다. 그 위로 조금 전 보았던 완향 선생의 1991년 작 구강조망(九江 眺望)이 겹쳐 보인다. 그렇게 구강포구에 그리움 짙은 붉은 노을이 깔리고 있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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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