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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여행후기

강진군청 직원들께 감사 드리며//여행기

작성일
2012.02.16 18:19
등록자
최평균
조회수
1872
청자골 강진 오일장
 
숙취로 예정보다 한 시간 정도 지난 9시경에 아내와 함께 숙박지에서 나오니 강진의 겨울공기도 무척 매섭다. 하지만 강진 하고도 남단의 항구 마량에는 그 매서운 추위에도 불구하고 게딱지같은 지붕 낮은 집들을 이어주는 줄기 같은 골목길의 투박한 화분들에는 꽃상추가 맛깔스럽게 자라고 있었으며 몇 가지의 화초와 바다와 마을을 경계하는 해변도로에는 제주도에서나 볼 수 있는 열대수가 가로수로 겨울을 나고 있었다.
 
이번 여행을 출발하기 전에 강진군청에 요청하여 우편으로 공급받은 정보에는 이곳 마량에서 가까운 대구면 고려청자도요지의 박물관이 9시에 개관을 한다하여 아침 여덟시에 나서기로 한 일정이 지난밤 늦게 도착하여 이곳이 고향이고 이곳에 몸 붙이고 있는 고형섭 시인과 그의 동향 몇 분과 함께 한 자리가 해후의 반가움으로 이야기길과 음주길이 밤늦게 까지 이어진 탓으로 피곤하였는지 다소 늦었다. 마량바다에는 열대성 난대림 120여종이 빽빽이 우거져 희귀식물의 보고로 통한다는 두 개의 섬인 까막섬이 있어 마량 경관의 등급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고 하는데, 가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더군다나 이토록 바람이 황량한 겨울에는 그저 섬은 섬일 뿐이다.
 
얼굴에 부딪히는 1월말 엄동의 쨍한 추위를 헤치고 황량한 겨울바다를 예상하며 마량항으로 나가니 부두의 석축과 포구, 심지어 물 한가운데 좌대에서 까지 릴낚싯대를 휘두르는 낚시꾼들로 아침이 부산하였다. 갑작스런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진 나도 한 낚시 하는 탓에 가까이 가보니 비취빛 바닷물 속에서 허연 숭어를 너도 나도 연신 잡아 올리고 있었다. 한참을 지켜보다 터미널로 가기 위해 낚시점과 횟집을 지나는데, 저 밑에서 갓 잡아온 펄떡펄떡 뛰는 숭어들을 횟집 수족관에 쓸어 넣고 있었다. 저 집의 숭어회는 금방 잡아와서 싱싱하니 자연스럽게 쫀득쫀득 맛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나의 입맛이 당겨지고 회가 동한다.(그래서인지 읍내에 갔다가 강진에서 회를 제대로 맛보려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물으면 모두들 마량을 이야기했다.)
 
간단히 우유로 허기를 재우고 기다리다 버스를 타고 어촌을 몇 개 지나고 더 지나서 청자박물관이 있는 대구면에서 내렸다. 이곳 청자촌 인근의 청자도요지는 9세기부터 14세기에 이르기 까지 약 5백년간 집단적으로 청자를 생산했던 마을로 9개 마을에 180여개의 가마터가 분포되어 있다고 하며,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 관리하고 있으며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잠정 등록되어있다고 한다. 태토, 연료, 해운, 기후 등이 적합한 이곳 사당리의 청자는 보물로 지정된 청자 중에 80%를 점한다고 하니 가히 청자제조기술의 꽃을 이루었던 곳이라 하겠다. 옛 장인들은 이 보물들을 빗고 구워 찬란하고 아스라한 빛의 청자를 출산하기 위해 몸도 마음도 정갈히 하였던 바 고려시대 도공들이 심신을 단련했던 정수사가 이곳에서 약 4Km 거리에 있었다.
 
‘강진고려청자도요지’라고 이름표를 붙여 놓은 구조물을 지나 사당리 청자마을에 들어서니 곳곳에 청자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나는 넓은 뜰에 청자모자이크로 만든 솟대와 도공의 동상을 수문장인양 거느리고 있는 박물관으로 들어섰다. 입구 좌측에는 안내 데스크가 있고 정면에는 진열대에 ‘다음 주 토요일에 경매할 작품입니다.’라고 안내 글을 달고 그 위에는 문외한인 내가 봐도 고고하게 파르스름 빛나는 청자들이 제 각각 경매 시작가와 낙찰예상가를 적은 명패를 앞에 놓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위에는 보기에도 귀한 고려청자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열심히 내 카메라에 담으니 안내인이 나보고 촬영은 괜찮은데 플래시는 안 된다고 하신다. 아뿔싸! 원래 종이나 천에 적은 고문서나 미술작품들은 불빛에 그 색이 변질될 수 있어서 플래시 촬영을 금하는데 고려청자도 그런 금기에 해당하는가 보다. 나는 웃으며 미안하다고 하니 이곳에 전시된 고려청자들은 거의가 국보급이라고 하시며 작품해설과 청차촌 안내를 해주셨다.
 
북쪽의 크고 작은 산에서 용이하게 얻은 땔감으로 만든 청자를 남쪽의 바다를 이용해 수송했을 돛단배를 재현해 놓은 이층까지 꼼꼼히 관람을 하고 1968년 농부에 의해 발견되고 이후 발굴한 옆의 실제 천 년 전에 청자를 굽던 가마터와 재현해 놓은 ‘옹기가마’, ‘백자가마’, ‘청자가마’를 구경하고 청자촌을 나섰는데,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도예문화원은 빗장을 걸어 잠그고 제 속을 보여주지 않았다. 내가 내린 버스와 다음버스의 시간사이에서 청자촌을 구경하자니 어쩔 수없이 걸음이 빨라진다. 이번 버스를 놓치면 한 시간여를 속절없이 기다려야만 하니 옛 성문 같이 멋지게 자리하고 있는 식당과 양지바른 길옆에서 모질게 자라고 있는 짙은 보라색 이름 모를 야생채소를 카메라에 담고 시간의 아귀를 맞춰 버스를 타고 강진읍으로 향했다.
 
강진터미널에서 다음 행선지인 백련사와 다산초당으로 가는 버스시간표를 확인하고 오일장이 열리는 장터로 향했는데, 강진은 매 4일과 9일에 장이 선다. 이곳 강진장에는 각종 약재와 보름이 지척인 때문인지 나물과 잡곡을 많이 팔고 있었는데, 그래도 바다가 가까운 농어촌인 관계로 수산물 상점이 다른 시골장보다 월등히 많았고 성업 중이었다. 또한 시골냄새 팍팍 나는 메주들이 상품으로 많이 나와 있었고 이상한 풀줄기를 말려서 팔고 있어 물어보니 야생국화 줄기라고 하였다. 꼬막, 키조개, 치자, 매생이, 파래, 겨우살이 등을 늘어놓은 길가 노지장을 구경하다 상설시장으로 들어서려는데 플라스틱 용기에 뼘치 붕어만한 물고기젓갈이 있어 이게 뭔가 하고 명판을 보니 굴비젓이었다. 곡물상점, 옹기전을 구경하다 장사는 뒷전으로 모여 앉아 식사와 소주를 마시는 어물전 아낙들을 보고 아침을 변변찮게 먹은 우리도 허기를 채우기 위하여 식당을 찾았다.
 
상설시장 귀퉁이에는 두 개의 식당이 있었는데 그 중에 팥죽을 끌이고 있는 광주식당으로 들어섰다. 나는 장터에 가면 그 지방의 특별한 그리고 가능한 저렴한 식사를 찾아서 막걸리와 함께 즐기길 원하는데 오늘은 마침 아내도 원하고 팥칼국수가 제격이다. 깔끔하다고 하기엔 무리여서 수더분하다고 하여야 할 식당에 들어서서 수더분한 아주머니에게 팥칼국수 한 그릇과 백반 일인분을 막걸리와 함께 시키니 칼국수도 듬뿍 주셨고 술은 원래 팔지 않으니 사다 주시며 백반을 내오는데, 반찬이 무려 12가지를 정갈히 차려 내오고 국도 한 그릇 더하니 이것이 싸고도 풍성한 전라도 12첩반상 백반정식으로 칼국수 4천원, 백반 4천원에 막걸리는 천원으로 도합 9천원에 진수성찬이 차려졌고, 테이블 옆에 자리한 아낙손님들의 구수한 전라도사투리 넋두리를 더하니 오늘 점심은 만찬 중에 만찬이 되었다. 껍질 벗겨 허연 미꾸라지 같이 보이는 팥죽 속의 칼국수가 고물거리는 솥단지를 카메라에 담고 부른 배를 앞세워 식당을 나서니 또 찾아 주시라는 주인아주머니의 덕담이 우리를 따라 나서는데, 식당에서 나선 우리를 처음으로 맞는 것이 늘어놓은 잡곡 중에 매끈하게 맑은 선지빛의 국산 팥이어서 결국 정원대보름을 떠올리며 아내에게 한 됫박 사줬다.
 
말린 시래기를 성의는 생략하고 늘어놓은 할머니의 노점을 지나 상설시장을 나서는데 큰 글씨로 ‘강진 4. 4 독립만세운동터’라고 써 놓고 그 밑에 이곳이 강진 상인과 군민들이 1919년 4월 4일 만세를 외쳤던 곳이라고 작은 글씨로 설명을 붙인 검은 비석이 눈길을 끄는데, 이것은 2010년 3월 5일 영랑 김윤식선생의 글씨를 집자하여 이곳에 세웠다고 적혀있었다.
 
이 시장 상인들은 참으로 이상한 게 아까의 어물전 아낙들도 그렇지만 노지의 과일전 아낙들도 예닐곱이나 모여 장사는 뒷전으로 아귀찜 국물에 벌겋게 비빈 밥을 안주 삼아 이곳 출생 소주인 잎새주를 나누며 사투리잔치를 벌이고 있었는데, 어쨌거나 나는 종이컵 가득 소주 한잔 얻어 마시고 덕담으로 값을 치렀다. 차안에서 심심풀이로 까먹으려고 한 됫박의 땅콩을 사서 배낭에 갈무리하고 나는 발걸음을 터미널로 향했다.
 
다산초당행 버스시간이 12시 40분이라 여유를 부리며 터미널에 도착하니 12시 33분. 화장실에 들렀다 표를 사고 버스를 기다렸다. 그런데 정시가 되어도 차는 들어오지 않는다. 의례히 시골버스는 조금씩 늦는 경우가 다반사라 마음 놓고 기다렸더니 10분이 지나도 버스가 들어오지 않는다. 조금 불안하여 매표소에 가서 물어보니 직원이 확인하여 줬는데, 아뿔싸! 그 버스는 정시보다 7분 일찍 출발했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럴 수가. 버스가 정시보다 늦게 출발하는 건 이해하겠는데 이렇게 일찍 출발해 버리면 나 같은 승객은 어쩌란 말인가? 버스시각은 승객과의 약속인데....... 이제 나는 다음의 남도여행에서도 버스시각표는 꼭 믿을게 못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거듭 미안하다는 매표원에게 표를 환불하고 결국 택시를 이용하기로 했다. 다음 버스편은 3시간 정도 기다려야 하니 부득불 예상 밖의 지출을 감수하여야 하였다.
 
읍내에서 택시를 타고 백련사로 향했는데 사실 돈이 조금 더 들어서 그렇지 택시를 타면 이동시간도 절약이 되고 가이드까지 받으니 한결 편하고 얻는 정보도 덤으로 따라온다. 이번에도 기사님이 가이드도 해주고 백련사에서 우리를 내려주고 택시는 다산초당으로 먼저 이동하여 기다렸다 우리를 사의재 까지 편안히 데려다 주었으며 친절히 해설도 해 주셔서 약속한 택시비에 조금을 더 보태 감사의 표시를 하였다. 초당에서 백련사로 이동하려면 산길이 오르막이라 백련사부터 들려서 초당으로 내려오라는 기사님의 권고로 나는 백련사로 먼저 향했다.
 
신라 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백련사는 귀족불교의 반발로 서민불교운동이 한창이던 1236년에 백련결사문을 발표하여 백련결사운동을 주창하면서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백련사 앞에는 커다란 배롱나무가 제 가지를 어지럽게 뻗어 산문 앞 공간을 꼼꼼히 채웠는데, ‘나무백일홍’이라고 하는 이 나무는 ‘부처나무과’이다. 그래서인지 사찰과 사당에는 대부분 이 나무를 심어 놓았는데, 언젠가 강릉 경포대에 있는 허난설헌 생가에 가보니 이 나무 줄기를 손으로 비비면 가지를 바르르 떤다고 하여 ‘간지럼나무’라고도 한다 하였다.
 
아내는 백련사 대웅전에 이르자 불전에 가족의 평안을 기원하는 정성을 올렸으며, 가족의 이름을 쓰고 밑에 ‘건강 재수, 좋은 인연’이라는 글을 써서 그 동안 하고 싶어도 참았던 기와불사도 이 사찰에 하였다. 이 절의 뒷켠으로는 7천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었는데, 동백이 아닌 나무도 더러 있어 스님께 여쭈니 비자나무와 후박나무라고 한다. 아직은 겨울이 한창이라 봄에 내 놓을 붉은 꽃을 몸속에서 키우고 있는 동백 숲 아래 다산초당으로 가는 오솔길 건너 비탈진 작은 밭에는 그 옛날 다산과 초의선사, 혜장선사가 즐겼을 것 같은 차나무가 굳게 어금니를 악물고 겨울바람에 대항하고 있었다. 이제는 다산과 혜장선사가 차와 학문을 논하며 교우를 위해 왕래했을 사색의 길을 따라 다산초당으로 향했다.
 
백련사를 나와 차밭을 지나 산길을 따라 걷다가 고갯마루의 앞쪽 다산초당 6백m, 뒤쪽 백련사 2백m라는 이정팻말을 보니 다산초당과 백련사 간 거리는 8백m인 것 같다. 고개를 넘어 예전에 베어서 딱 화살 만들기 알맞은 키 작은 대나무 군락을 우측에 두고 지나니 양지바른 곳에는 언제 부터고 이 길을 지켜보고 있었을 이름 모르는 야생란이 제 이파리를 멋들어지게 사방으로 휘갈겨 ‘나도 난이다’라고 항변하고 있었다. 고개를 내려오니 다산이 흑산도로 유배 간 둘째형 ‘약전’을 그리며 마음을 달랬다는 ‘천일각(天一閣)’을 지나 다산초당(茶山草堂)에 이른다. 다산이 이곳 강진으로 유배를 와서 세 번째로 거주한 이 초당에서는 1808년부터 1818년 9월 유배가 풀릴 때까지 약10년 간 머무르며 제자를 가르치고 학문탐구와 저술에 몰두하여 선생의 대표작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6백여 권의 책을 완성하여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 하였다는 평을 받는다.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 이듬해 그러니까 1809년 다성(茶聖)으로 불리는 초의선사를 만나 시문과 경서를 가르치며 약 9년을 교류하였다고 하는데, 이들의 만남은 차와 깨달음은 둘이 아니라는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사상이었다고 하며 초의는 동다송(東茶頌)을 다산은 동다기(東茶記)를 지었다고 한다. 또한 해남 두륜산 대흥사의 12대강사(大講師)로 기록되는 큰스님인 혜장선사는 초의선사보다 먼저인 1805년 어느 봄날 선생이 백련사를 오르다 만났다고 하는데, 혜장선사가 입적한 1811까지 교우하였으며 주역(周易)과 다선(茶禪)을 논하며 밤을 새웠고 혜장선사는 다산에게 주역을 배우고 다산은 혜장선사에게 차를 배웠다고 한다.
 
풀포기처럼 어린 새싹을 길러낸다는 뜻으로 이름붙인 초당(草堂)에는 선생이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다는 일명 ‘송풍루(松風樓)’라는 동암(東庵)과 제자들의 유숙 처였으며, 차와 벗하여 밤늦도록 학문을 탐구하였다고 하여 일명 ‘다성각(茶星閣)’이라고도 불렸던 서암(西庵)이 있으며 ‘다산 사경’으로는 초당 서편 뒤쪽에 유배가 풀리기 전 선생이 발자취를 남기려는 뜻으로 직접 ‘丁石’이란 글씨를 새긴 ‘정석바위’와 선생께서 직접 수맥을 잡아 만들었으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항상 약수가 솟아 나와 찻물로 썼다는 ‘약천’, 주위에서 자생하는 차 잎을 따다 그늘에 말린 후 솔방울을 지펴 차를 끓였던 ‘차를 끓이는 부뚜막’이란 뜻의 ‘다조’, 그리고 선생께서 직접 연못을 만들고 바닷가의 돌을 가져다가 가운데 조그만 봉을 쌓아 ‘석가산’이라고 명명한 ‘연지석가산’을 꼽는데 이들은 모두 정약용 선생의 손길이 닿았던 것들이다.
 
초당에서 시인 정호승이 ‘뿌리의 길’이라고 노래한 산길을 밟고 주차장에 내려서니 기사님이 구경 잘했느냐며 반갑게 맞아주셨다. 우리는 기사님의 안내로 인근의 다산유물전시관에 들렸는데, 이곳도 입구에 들어서니 파르스름한 빛깔의 고려청자가 맞으며 아직도 우리가 청자골에 있음을 상기시켜주었다.
 
이제 우리는 다시 강진읍으로 향했는데 기사님이 안내해주신 곳은 정약용선생이 강진으로 유배를 와서 처음 4년 동안 기거하였던 사의재였다. 당시 오갈 데 없는 선생을 동문 매반가의 주모가 골방을 하나 내어준 것으로 다산은 이곳에 ‘네 가지(생각, 용모, 언어, 동작)를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4의재라는 당호를 걸고 학문에 정진하여 ‘경세유표’ ‘애절양’ 등을 집필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2007년에 우물가 주막집터를 원형 그대로 복원하였다고 하는데, 기사님은 주막집 마당에 있는 주모 모녀상 중 딸이 정약용이 이곳에서 주모와 딱 하룻밤 사랑을 나눴고 그때 회임하여 출산한 다산의 딸이라는 설이 있다고 하셨는데, 말 그대로 그냥 설이라고 한다.
 
이 사의재에서는 다산의 시 우래(憂來)가 나그네를 맞아 주었는데,
 
酗誶千夫裒 천명이 술에 취해 떠드는 속에
端然一士莊 단정한 선비 하나 의젓하게 있고 보면
千夫萬手指 그들 천명이 모두 손가락질 하며
謂此一夫狂 그 한 선비야 미쳤다고 한다네
 
라고 내려놓은 글은 외로운 선비 다산이 유배지에서 홀로 단정히 앉아 어지러운 세상을 구제하려는 깊은 사념에 잠겨 있었으니 미친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 없었다는 다산의 한숨이 엿보여 고달픈 유배살이에 세상을 원망하던 다산의 쓰린 마음과 불행에 좌절하지 않던 용기를 읽을 수 있었다.
 
이곳 주막에서는 파전 등속과 동동주를 판다고 하여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앉은뱅이 식탁이 두 개씩 세 줄이 있었는데 이미 두 팀이 선점하여 여행의 또 다른 맛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도 자리를 잡고 매생이로 부친 매생이전과 동동주 반 항아리를 시켰다. 이런 유서 깊은 곳에서 동동주를 판다면 술 좋아하는 나 같은 주객은 금상첨화일 것이나 전북 남원 광한루의 월매집도 이런 식으로 문을 열고 손님을 맞다가 찾는 이가 없어서인지 폐점한지 오래다. 잠시 후 매생이전과 동동주가 나왔는데, 파전은 국내 어디를 가더라도 쉽게 먹을 수 있으나 매생이전은 이런 곳에서 남도 사투리 속에서 귀하게 먹어서 그런지 맛도 특별하고 바다내음도 입안 가득히 채워져 찰랑인다.
 
동동주로 거나해진 나는 골목길을 더듬고 물어서 양지바른 말랭이에 자리한 강장법단(康莊法壇)을 구경하고 영랑생가로 향하였다. 볕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영랑생가는 안채, 문간채, 사랑채 등이 있는데 선생은 이곳에서1903년 1월 16일 출생하여 주로 사랑채에서 주옥같은 시들을 출산하셨다는데, 영랑은 김윤식 선생의 아호라고 한다. 그는 1930년 박용철, 정지용 등과 함께 주축이 되어 창간한 ‘시문학’지를 통하여 ‘모란이 피기까지는’, ‘언덕에 바로 누어’,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등 30여 편의 대표적인 작품을 발표한 것과 함께 1950년 9월 29일 작고하기 까지 80여 편의 주옥같은 시를 발표하였다고 한다.
 
특히 영랑의 시편들은 음률이 뛰어나서 미당 서정주도 생전에 부러워하고 벤치마킹했다고 생전에 고백하였었다고 한다. 그렇게 시편에 음률을 녹여 넣을 수 있었던 것은 강진 대지주의 장남으로 태어난 선생이 일제강점기 그 척박한 시절에도 일본을 통하여 측음기를 들여와 음악을 많이 들었으며 부친의 재력으로 자주 벗들과 술자리를 마련하고 교우하며 기녀들의 가무를 즐기다보니 자연스럽게 글에 음률이 배어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영랑은 매끄러운 운율과 세련된 시어로도 유명하지만 우리 음악과 서양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나도 예전부터 자주 음악을 접하고 즐기며 내 글에 음률이 배기를 바라고 있지만 내 영혼이 그런 음률을 받아들이기는 아마도 내 생에는 전혀 불가한지도 모르겠다. 생가 앞의 박물관인지 기념관인지 하는 곳은 공사가 진행 중으로 금년 내로 개관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그만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니 ‘영랑현구문학관’을 곁눈질하며 터미널로 향했다. 이번 여행은 우리나라를 서양에 최초로 알린 ‘하멜보고서’의 저자 헨드릭 하멜을 기리는 ‘하멜기념관’과 태평양그룹이 비업무용토지에 특별 과세하던 것을 피하기 위해 차나무를 심었는데 차를 기르고 보니 따야 하고, 따서 차를 생산하니 ‘설록차’라 이름 짓고 화장품회사 태평양을 통해 전국에 판매하게 되었다는(그냥 내가 얻어 들은 ‘카더라’ 통신) 거대한 녹차밭은 다음 여행에 보기로 하고 목포로 향했다.
 
출발 전부터 아내에게 마량항에서 싱싱한 생선회를 사주겠다고 약속하였으나 시간이 여의치 못하여 할 수없이 목포항 인근에서 젊은 아낙이 호객을 하는 식당으로 찾아 들었다. 이곳은 목포의 커다란 섬인 압해도가 연육교로 연결이 되므로 해서 더 이상 이난영의 ‘목포는 항구다’라는 명성을 내세우기는 어렵다. 이 지역은 평소 세발낙지가 유명하여 청하니 지금은 겨울이라 인근에서 세발낙지가 잡히지 않아 즐길 수 없다고 하였다. 차림사 아낙의 친절하고 여유롭게 권하는 대로 민어회 한 접시와 산낙지 한 접시를 시켜서 소주 한잔하고 나니 이것이 이번 여행을 즐겁게 잘 마치고 마시는 ‘매조지주’인 것이다. 식당을 나오며 값을 치르고 보니 이 식당에는 종업원, 사장 포함 중년의 이쁜 아낙들밖에 없으니 아마 이곳이 여우골인 듯싶다. “여우님들한테 홀려서 여우골에 들어와 잘 먹고 마시고갑니다.”라고 웃으며 인사하니 아낙들은 모두 기꺼이 이쁜 여우가 되어 여행길 끝까지 조심히 가시라고 인사를 하여 주어 어둑한 바다에 웃음을 흩날리며 목포역으로 향하니 여행의 끝이 참으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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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실 관광진흥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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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업데이트
2024.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