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혁 및 유래

선사시대

청동기 시대 유적인 고인돌이 작천 북부 구상·내동·신기마을 부근에서 30여기 분포되었음이 확인되었고, 작천지대의 지리적 조건을 생각함에 산과 들에는 초목이 우거져 수렵자원이 풍부하고 하천에는 물이 풍부하여 어로활동에 편리하였을 것이니 선사인들이 부족을 형성하여 이곳에서 모여 살았음을 추정.

마한시대

마한시대에는 한사군 설치 이후에 보급된 철기문화와 함께 발달되었을 것이므로 작천면은 넓은 평야와 풍부한 수원을 보유한 지역으로 농경문화가 대단히 발달하였을 것임. 마한시대의 유적이라 구전되어 오고 있는 것으로 성의 윗부분은 모두 없어졌지만 기초형태는 완전하게 남아있는 죽산마을 뒷산 성뫼 옛성터가 있음.

백제시대

백제시대의 작천은 도무군에 속함. 도무현은 해남 서남부지대 고서이현, 색금현, 황슬현, 동음현 4개현을 거느린 대군으로서 그 치소가 바로 작천면과 병영면의 경계지점인 중고리였으니, 당시 도무군 치소를 향한 인마의 내왕은 물론 문화의 교유와 물화의 집산이 빈번하였을 것으로 봄

통일신라시대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자 이 지방도 신라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신라 경덕왕 1년 도무군이 양무군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양무군은 속현을 거느린 거군으로 종전의 세력을 유지하였고 그 치소 또한 여전히 중고리에 두었으니, 작천은 양무군 치소의 주변마을로서 신라의 문화에 젖으면서 농업 위주로 발전함.

고려시대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강진지역의 행정관할구역이 몇차례에 걸쳐 변화를 거듭했지만 작천은 비옥한 들판과 풍부한 수원, 울창한 산림을 경유한 천혜의 농촌마을로 의식이 넉넉하고 인심이 순후하여 군현제도의 개편과 관계없이 살기좋은 농촌으로 발전했음.

조선시대

작천면 일원이 조선시대에는 3개면으로 나뉘어 다스려졌음. 작천이란 이름은 川名으로 현종년도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 “작천은 일명 송계니 월출산에서 발원하여 강진현 북쪽 고도강(성전면 수양리)을 지나 장흥부로 흐른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옛날 우리 선조들이 “까치내”라고 불러오던 하천의 이름을 한자로 옮겨 기록한 것을 취하여 3면을 합하면서 작천면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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