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의 장수 김억추 - 임진왜란의 명장

본관은 청주이고 자 방로(邦老), 시호 현무이다. 전라도 강진 출신.

아버지는 증 병조판서 김충정(金忠貞)이다

전라남도 강진군 작천면 박산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1577년(선조 10년) 알성 무과에 급제하였는데 무이 만호가 되어 북변에서 전공을 세웠고 제주 판관·사복시 판관, 진산·순창 등의 현감을 지냈다.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김억추를 방어사로 임명했고 1594년 만포진 첨절제사가 되고, 이어 진 주목사·고령진 첨절제사를 지냈다. 1597년 정3품에 올라 전라 우도 수군 절도사가 되어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을 따라 어란포 해전과 명량해전에 참전하였고 밀양 부사를 거쳐, 1608년(광해군 즉위) 종2품에 올라 경상 좌도 병마 절도사가 되고 뒤에 제주 목사를 지냈다.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강진군 박산 마을로 낙향하여 여생을 보내다가 71세에 사망하였다.
정조 임금 때 사당 금강사를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김윤식(1903 ~ 1950)

영랑(永郞) 김윤식(金允植)은 전남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 211번지에서 부친 김종호와 모친 김경무 사이에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5년 3월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이듬해 상경하여 기독청년회관에서 영어를 수학한 후 휘문의숙에 진학하였다. 휘문의숙 재학시절이던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영랑은 자신의 구두 안창에 독립선언문을 숨겨 넣고 강진에 내려와 독립운동(강진 4․4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 등에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靑山學院)에서 수학한 그는 용아 박용철 등과 친교를 맺었다.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 후에는 시 창작활동에 몰두하였다. 영랑은 1930년 3월 창간한 『시문학』지를 중심으로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변영로, 김현구, 신석정, 허보 등 당대 최고의 시인과 더불어 우리 현대시의 새 장을 열었다. 1934년 4월 『문학』지 제3호에 불후의 명작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발표하였으며, 1935년 『영랑시집』을, 1949년에는 『영랑시선』을 출간하였다. 영랑은 조국 해방이 이루어질 때까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및 삭발령을 거부한 채 흠결 없는 대조선인으로 의롭게 살았다. 광복 후 신생 정부에 참여해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냈던 그는 1950년 한국전쟁 때 부상당하여 9월 29일 서울 자택에서 47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영랑은 생애 86편의 시를 남겼으며, 정부에서 2008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김충식(1889 ~ 1953)

강진읍 동성리에서 아버지 영준(1863 ~ 1928)과 어머니 임선의(1860 ~ 1909)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충식은 ‘자기 땅만 밟고 강진에서 서울까지 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땅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지는 갑부였다. 부모에게서 받은 유산을 토대로 전통적인 지주경영 방식에서 벗어나 농업을 회사형태로 운영하는 새로운 농업경영의 전환을 시도했다고 한다.

잔병치레가 많았던 김충식은 아버지때부터 이어져 온 세브란스 전문학교와의 인연으로 1947년 세브란스 의대에 의과대학의 경영을 위하여 전남의 장성, 무안, 화순, 함평 등지에 있는 자신의 토지를 전부 기부하였다. 이는 당시 1억원 가치나 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였으나 ‘약소한 기부’라고 표현하며 자신을 나타내려 하지 않았고 조선의 열손가락 안에 드는 갑부였지만 매우 검소했던 사람으로 전해진다.

김충식의 묘소는 병영면 박동리 마장등이란 곳에 있다. 위쪽에는 선친의 묘소가 있으며 웅장함을 자랑하는 선친의 묘소에 비해 김충식의 묘소는 의외로 단촐하다.

황대중(1551 ~ 1597)

황대중은 황희 정승의 5대손으로 영암군수로 있던 조부 황응을 따라 전라남도 강진군 작천면 구상리로 떠나오면서 이곳에서 터를 잡고 살게 되었다.

그는 어머니가 병에 걸려 앓자 자신의 왼쪽 허벅지 살을 베어 어머니의 약으로 쓰게 해 어머니는 그것을 먹고 효험이 있었는지 병이 나아 사람들은 황대중의 효성에 감복하여 그를 효건(孝蹇)이라 하였다. 효건이란 효를 실천함으로 생긴 절름발이라는 뜻이다.

황대중의 삶은 1597년 발생한 정유재란에서 마지막을 맞게 되었다. 이에 김완(金完) 장군이 황대중의 시신을 말의 등위에 얹어 주자 애마는 주인을 태우고 300리 길을 밤낮으로 달려 황대중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전남 강진으로 향했다. 그리고 황대중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가 결국 주인을 따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말의 충심에 감동하여 주인이 묻힌 묘 옆에 말의 무덤을 만들어 ‘양건 당애마지총(兩蹇堂愛馬之塚) ’이라는 비석을 세워 주었다. 애마총은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고, 현재까지 후손들이 소중히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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