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엣세이) 봄 햇살아래 고추를 심었습니다.

작성일
2015.04.28 11:31
등록자
이홍규
조회수
1479
 봄바람을 등지고 고추를 옮겨 심는 날 (2015. 4. 25) 

 
 먼동이 트는 새벽녘에 창문을 두드리는 봄바람 소리에 눈을 떴다. 마당에 나오니 사방이 고요하다.



저기 멀고먼 어둠속에서 한줄기 햇살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올라온다. 새벽공기가 참 시원하고 상쾌하여 정신이 맑아진다. 



  샘가에 가서 차갑고 맑은 물에 얼굴을 씻으니, 옛사람의 묵은 흔적을 씻은 듯 홀가분한 생각이 마음을 채운다. 진정한 비움을 통해 새로운 것을 채우는 것이 마음수행 이라는 생각을 한다. 


  수행이라는 말은 속세를 떠나 산속에 기거하면서 도를 닦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말인데 그냥 평범하게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말이 아닌 듯 하다.
 

  창고를 열고 지게와 낫을 챙겨 뒷산의 신우 대나무 숲으로 향한다. 대나무를 베어 고추를 지탱하는 지주대로 사용하기 위해서 새벽부터 부산을 떠는 것이다. 낮설은 사람의 방문에 짐짓 놀랐는지 신우대가 요란한 소리를 지른다.
 

  그래도 거사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런 통과의례는 당연한 일로 여기고, 지게를 받혀놓고 낫으로 신우대를 힘차게 내리쳤다. 요란한 소리로 난리를 치던 신우대가 쓰러지고, 대나무 숲은 새벽의 정적을 깨는 소리없는 아우성이 가득하다.
 

  이파리와 잔가지를 치고 푸른 기둥이 수북이 쌓였다. 엄지손가락 정도 굵은 신우대가 거친 비바람을 이기고 가을까지 고추를 지켜줄 생각을 하니 미안하면서 대견스럽다. 신우대 이파리와 잔가지들을 모아서 대나무 숲에 뿌렸다. 밑거름이 되어 다른 대나무들에게 양분을 공급하라는 깊은 뜻에서 되돌려 주었다.
 

  지게의 바작에 신우대를 가득 싣고 산을 내려오니 햇살이 산아래 펼쳐진 들판을 비추고 있다. 아침이슬이 맺힌 부드런 고사리와 곰취가 발자국 소리에 놀라 몸을 움츠린다. 



  어제 장에서 사온 고추육묘 200주를 비닐멀칭 구멍에 꽂으며, 가을까지 잘 견디어 많은 열매를 맺으라는 당부의 말을 전하며, 신우대 지주에 끈으로 묶어둔다. 주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드런 고추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낮설은 타향에 적응이 잘 안되는 듯 했다.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작은 시련쯤은 가볍게 지나쳐야 한다. 작은 충격과 변화에 상처받고 주저 앉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것은 식물이나 사람이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고추를 괴롭히는 것은 잡초와 병해충 이다. 비닐멀칭을 씌웠지만, 비닐 밑으로 잡초가 뿌리를 내리면서 고추의 양분을 빼앗아 가고, 탄저병과 여러 가지 병해충이 혹독한 고통을 안겨준다. 하지만 이것들과 정면으로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고추 농사는 망치게 된다. 



  고추밭 주인은 여러 번의 전투를 치르며, 가을까지 강행군을 하기에, 고추농사도 힘이 든다. 작년에도 산전수전을 치르고 고추수확을 쟁취하였기에, 올해도 걱정이 없다. 



  200주를 다 옮겨 심고, 지주대로 묶어주고, 조루로 물을 주면서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가을동화를 함께 완성하자는 말로 용기를 부어 주었다. 



고추 200주를 심으며, 자연의 이치를 다 깨달은 것처럼 이야기 하는 것이 참 이상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하나하나 배워가는 것이다. 



  농촌마을에 살면서 고추농사를 지으며, 자연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서 겸손을 배우고 감사하는 마음을 얻는 것이 큰 보람이다.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고, 오직 승자독식과 돈이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사람들을 불행으로 내몰고 있다. 



  자급자족을 위해서 고추를 심는 것이다. 가을에 수확하여 고춧가루를 만들어 김장하고, 도시에 있는 친척들과 나누어 먹으려 한다. 능력과 형편이 된다면 넓은 밭에 친환경 유기농 고추를 많이 재배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공급하면 좋겠지만 작은 규모에 만족하기로 했다.

 

  연로하신 부모님이 힘든 농사일을 하실 수 없어서 논밭을 일구며 흙의 가치를 지키고 있다. 인생이란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기에 흙을 밟으면 생명의 기운이 느껴진다. 



  고추밭에 물을 다주고, 이러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점심때가 되었다. 부드런 쑥으로 끓인 된장국에, 살짝 데친 두릅을 초장에 찍어 입안에 넣으니 그 맛이 일품이다. 곰취나물과 고사리 나물을 곁들인 식사는 황제의 밥상보다 더 화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