엣세이 - 느림과 차분함의 여유

작성일
2010.09.19 23:29
등록자
이홍규
조회수
1374
느림의 공간 증도


이홍규 / 향토문학가 / 저서: 모란꽃소년, 천년의 약속


작렬(炸裂)하는 태양열이 대지를 달구어서 그런지 산천초목도 지칠 대로 지쳐있다. 8월의 무더위가 그칠 줄 모르고 조금만 발걸음을 옮겨도 온몸이 땀투성이다. 얼마 안 남은 여름방학의 아쉬움을 달래고 추억을 만들어 주기 위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곳을 찾아 집을 나섰다. 처음 가는 여행이라서 무척 좋아하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와 함께 우리 가족을 태운 자동차는 목포방향 으로 초록빛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갔다.


삼호방조제를 지나니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 하더니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원도우브러쉬는 쉴 새 없이 빗물을 닦으며 시야를 확보하려 애를 쓰지만 자동차는 속도를 늧 추며 조심스럽게 목포시내를 지나 이정표가 안내하는 무안 방향으로 향했다. 예상치 못했던 장대비는 폭염을 식히기 위한 소나기였다. 시계바늘은 정오를 지나 그런지 뱃속에서 허기가 감돌고 시작했다.


차를 세우고 무안에서 유명하다는 세발낙지 요리를 먹기 위해 식당에 들어갔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잠시 더위를 달래고 주문한 세발낙지가 식탁에 올라오니 젓가락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식사를 마치고 함께 온 민제네 식구들과 방죽을 가득채운 하얀 연꽃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진흙탕 속에서 하얀 꽃을 피워낸 연꽃이 무척 신기한 듯 향기를 맡아보고 꽃을 쓰다듬었다.


무안의 연꽃방죽의 풍경을 마음속에 담고 반짝이는 햇살을 가르며 다시 길을 달렸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갯벌위를 갈매기들이 먹이를 찾아 날아다니고 있는 모습이 차창을 스치고 지나갔다. 갯벌은 다양한 생물들이 공존하고 있는 생태계의 보고(寶庫)이다. 육지에서 흘러내려온 온갖 오물을 깨끗이 정화하는 갯벌의 자정능력에 대해서 설명하자 아이들이 무척 흥미 있게 이야기를 들었다.


한참을 달려가니 증도대교가 눈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작년에 개통하여 그런지 무척 튼튼해 보이고 듬직해 보였다. 대교공원에 차를 멈추고 함께온 민재, 민성이 가족과 순간의 추억을 카메라에 담았다. 서울의 어느 방송국에서 왔다는 카메라맨이 민성이 모습이 귀엽다고 증도대교를 배경으로 공원을 거니는 모습을 촬영했다. 텔레비전에 꼭 나오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다리위로 들어서니 바다 한가운데를 차를 타고 지나가니 기분이 무척 상쾌했다.


증도에 들어서니 바람결에 갯벌의 냄새가 날려 왔다. 갯벌이 펼쳐진 해안도로를 따라가니 우리 일행이 머물 숙소가 기다리고 있었다. 드넓은 바다가 내려다 보이며, 파도가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가 시원하게 들려왔다. 저 멀리 바닷가 절벽사이에 솔숲이 우거져 있고, 먼 바다엔 뱃고동을 울리며 오가는 배들과 갈매기들의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했다.


짐을 다 저리정돈 하고 숙소를 나와 바닷가로 내려갔다. 하얀 파도가 사르르 다가와 물보라를 일으키고 왔다 갔다를 반복하는 모래를 밟는 느낌이 무척 부드럽다. ‘주리’와 ‘효리’는 조개껍질을 주워와 목걸이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작고 앙증맞은 조개껍질에 작은 구멍을 내고 실로 엮어 만든 목걸이를 걸어주니 무척 즐거워 한다. 첫째도 함께 왔을면 좋았을 것인데, 여름캠프 행사에 가서 함께 못왔다. ‘민재’와 ‘민성’이는 사내 아이들 이라서 그런지 물장구도 치고 공놀이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 갔다.


어느새 한낮의 이글거리던 해는 서쪽 수평선 너머로 얼굴을 감추고, 저녁 노을이 지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야외에 나오면 남편들이 다 해야 한다’는 불문율을 지키기 위해 민재 아빠와 역할을 분담하여 정성스럽게 식사를 차렸다. 숯불이 이글거리는 석쇠에 삼겹살을 올리니 맛있는 냄새가 마당을 가득 채웠다. 세상에서 가장 풍성한 식탁에서 웃음꽃을 피우며 맛보는 음식은 진수성찬(珍羞盛饌) 보다 더 맛이 뛰어났다.
 
밤하늘을 수놓은 별빛 조각들 사이로 별 하나가 수평선 너머로 떨어졌다. 떨어진 별빛은 바닷속 깊은곳 에서 곤히 잠들었을 것이다. 별의 최후를 위로 하는 듯 희미한 등대가 어두운 바다를 비추며,외로움을 달래고 있었다. 모닥불 연기가 피어 오르다가 바닷바람에 불꽃이 사르르 잠들자 어둠은 깊어 갔다. 세상은 파도가 들려주는 자장가를 들으며, 별빛 이불을 덥고 살포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직 날이 밝지 않았는데 잠에서 깨어 일출을 보기 위해 바닷가로 걸어가니 파도가 다가와 인사를 했다. 새벽공기가 무척 상쾌하여 몸과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해오름을 기다리는 행복한 시간을 허락하신 것에 대하여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수평선 저 멀리서 분홍빛 둥근 태양이 고개를 내밀고 기지개를 펴고 있었다. 새날을 맞이하는 기쁨에 감격의 탄성을 자아내며 힘차게 파도가 넘실거렸다.


해가 중천까지 떠오르자 염전을 향해서 느린 발걸음을 옮겼다. 해안도로를 따라 가니 소금창고가 즐비하게 펼쳐진 염전에 도착했다. 먼저 소금박물관에 들려 증도염전의 역사와 소금에 대한 자세한 전시물을 관람했다. 

박물관을 나와 염전체험장 에서 해설사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직접 소금만드는 체험을 하기위해 아이들과 함께 염전에 들어갔다. 밀대로 바닷물을 밀고가고 오는 것을 반복하니 신기하게도 소금알갱이가 맺히기 시작했다. 바닷물이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염전에서 15일 동안 뜨거운 해살과 바닷바람이 불어야 한다고 한다.


증도는 소금이 생산되기 위한 천혜의 조건을 가진 곳이다. 소금이 느리지만 긴 시간을 통해서 만들어 지듯이 차분한 기다림과 인내가 사람에게도 필요하다. 그래서 이곳을 슬로우 시티로 지정 했다는 설명을 들었다. 빠름은 무척 편리 하지만 뭔가 허전하고 공허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러나 느림은 차분하게 생각하고 보고 느끼며, 부족함을 채워가는 여유로움을 느끼게 한다.


염전을 나와 ‘짱뚱어 다리’를 향해서 걸어갔다. 우전해수욕장 좌측 갯벌위에 길이 475미터 나무로 만든 다리로 썰물때 다리를 건너면,짱뚱어,칠게,조개등 다양한 갯벌생태 생물을 관찰 할 수 있는 곳이다. 다리에 도착하니 마침 물이 빠지고 있었다.
 
다리를 거너는 아이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다리위를 뛰어갔다. 아마도 나무판을 밟는 느낌이 좋아서 그런 것 같았다. 갯벌풍경을 바라보며 천천히 걷는 여유로움과는 대조적 으로 더운 날씨탓에 비오듯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닦으며 걸어갔다. 건너편에는 하얀 백사장이 펼쳐져 있고 소나무 숲에서 더위를 식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증도에서의 여행을 통해서 가족들은 모처럼 느림과 차분함을 느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되돌아 오는 여정은 마치 인생과도 같다. 되돌아 보고 다시 생각하며 차분히 자신을 발견하고 추억을 정리하는 것이다.


증도가 다른 지역에 비해서 특별하게 구별되는 풍경이 있거나 볼거리가 많지는 않았다. 우리가 살아가는 농어촌지역과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증도에는 다른 지역에 없는 천연염전이 있고, 소금에 얽힌 역사와 사연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증도의 염전과 갯벌에 가보고 싶어 한다. 여행은 낮선곳의 자연과 문화를 새롭게 접하는 기회를 제공 하는 것 이므로 먼 곳을 마다않고 가는 것 같다.


두 딸들은 증도에서 보고,듣고,체험한 내용을 일기에 또박또박 써 내려갔다. 먼 훗날 써놓은 일기를 보면서 어릴 적 추억을 회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