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겨울바다의 기억들

작성일
2009.05.11 13:01
등록자
이홍규
조회수
1319

 바쁜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끔식은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때가 있다.  넓은 바위 위에 앉아 찬바람을 헤치며 바다와 만나 아름다운 비경을 온몸으로 느끼고 바다가 들려주는 속삼임의 소리를 듣고 싶은 생각들이 마음속을 가득 채웠다.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나, 여행을 떠나리라고 결심하고 짙은 안개로 길은 어둡고 사나운 북풍은 몰아쳐 몹시 몸이 떨려오는 늦겨울 새벽이었는데,  짐을 꾸리고 조용한 아침의 거리로 나섰다.

찬 바람이 휙휙 불어오는 길을 걸어가면서도 기분은 밝았다. 바람에 귀를 기울이고 밤사이 변한 조각구름을 감상하면서 삶의 향기를 음미하면서 지나온 발자취가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얼마쯤 걸으니 몸이 더워졌다. 그러나 바람은 여전히 나그네의 앞길은 막는 것처럼 세차게 불어온다. 마지막 남은 생명의 열정을 태우는 모습처럼, 겨울은 혹독하게 신음한다. 비록 생명의 활기가 사라져 버린 냉혹의 계절이지만 머나먼 희망이 사라지지 않고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터미널에 도착하여 바다로 가는 차표를 구입했다.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겨울 바다에 서면 내 맘속에 스며든 삶의 찌꺼기와 불안감들이 모두 사라지리라 생각했다. 지나간 시간을 회상하며 그리움에도 쌓여보는, 그러나 흥분도, 기대도 없이 냉정하게 내가 걸어가야 할 길과 참된 생명의 가치를 발견하는 시간이 될것이라는 기대를 했다.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차는 다섯 시간을 달려 동해의 해안가에 닿았다. 나는 무언가를 찾으려는 사람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멀리까지 펼쳐진 수평선 끝 쪽을 아득히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흰 물결이 손짓하고 두척의 빠른 범선이 미끌어지듯 달리고 있었다. 햇빛은 겹겹이 쌓인 구름을 뚫고 부채살 모양으로 비치고 그 사이로  갈매기들은 백색 날개를 펴고 유유히 바다위를 배회하였다.

나도 거센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날아올라, 창공에 높이 뜬 갈매기가 되어 검푸른 바다를 보니 창공은 공허함과 바람의 거친 숨결만이 가득했다.

갯바위에 푸른물결은 거침없이 하얀 물보라를 연거푸 쏟아내고 철석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낮선 방랑자를 맞이해 준다.  하얀 백사장에 물결은 흔적들을 지우며 세상의 모든 시름도 흘려보낸다.  삶이란 이처럼 쌓인것을 흘려보내야 하는것이기에 마음속에 묵은 욕심을 하얀 물결에 보냈다.

나는 따뜻한 마음으로 다시 소생한 듯이 흘러온 세월을 평안한 시선으로 맞이했다. 놀라고 어리석고 참혹했던 일들을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드리며, 험준한 인생 여정에 몸을 맡긴다.  모든 것은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인제서야 알았다.

차가운 바람을 피해 통나무집 아늑한 찻집에 들려 차가운 손을 녹이고 창가에 앉아 수증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차한잔에 온몸의 온기를 느끼며 노송이 우거진 하얀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를 다시금 바라다 보았다.

마음속은 공허한 상태가 되어 세상의 시름과 걱정들을 모두비웠다. 마치 큰 깨달음을 얻기위해 수행자가 되어 공허한 망각의 바다로 들어갔다.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동행이 없이 홀로 떠나온 길이라 조금은 외로움의 흔적이 보였고,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에게 미안함을 느겼다.

바다! 그곳은 말없이 모든 사람들을 반겨준다. 때로는 거친 풍랑과 태풍을 동반하여 인간의 교만함을꾸짖는다.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바다가 두려움의 대상이다. 난폭한 바다가 잠잠해지길 기다려 바닷일을 나가곤 한다.

해안도로를 걸으며 수평선 멀리 오가는 배들이 시야에서 사라진다. 너무나 한적한 곳이라서 그런지 지나가는 버스도 드물고 거친 절벽을 이룬 곳에는 철책으로 들러쌓여있다.  한참을 걸어가니 오징어를 즐비하게 널어놓은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바람이 제법 차갑게 옷깃을 여미게 하여 모닥불을 지펴놓은 모래밭에 가서 옹기종기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노인들과 함께 어울려 소줏잔을 나누며 덜마른 오징어를 구워 술안주삼아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마을 어른들과의 짭은 만남을 아쉬워한채 지나가는 버스를 잡아타고 어둠이 내리는 도로를 달려 마지막 밤차를 타기위해 또다른 목적지를 향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깊은 어둠과 차가운 기운이 느꼈고, 다시 차표한장을 사서 마지막 밤차를 타고 다시 삶의 터전으로 돌아왔다.  

여행을 통하여 낮선곳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새로운곳의 경치가 주는 감동을 느꼈고 자칫 느슨하게되는 생활의 나태함을 벗어버리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