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엣세이) 고추 수확의 기쁨

작성일
2013.09.17 15:26
등록자
이홍규
조회수
1571
 새벽을 지나 동트기 직전에 일찍 일어나 고추 밭으로 향한다.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이 발자국 소리에 놀라 땅바닥으로 떨어진다. 한낮의 뜨거운 열기기 때문에 해뜨기 전에 고추를 수확하러 간다.
 
 올해는 일조량이 풍부하고, 거친 태풍이 오질 않아서 그런지 고추가 주렁주렁 많이 열렸다. 붉게 물든 고추가 한 손에 가득 잡힌다. 김장김치를 담기 위해 올 봄에 모종 이백 주를 사서 심었다. 처음엔 연약한 모종을 보면 언제 커서 수확을 할까 내심 걱정했는데, 수확을 하게 되어 대견스럽게 느껴진다.
 
 고추농사를 하면서 가장 무서운 적은 탄저병 이다. 소리소문 없이 찾아오는 탄저균을 제때에 퇴치하지 못하면, 서서히 말라 죽게 된다. 그래서 고추농사 하면서 전혀 농약을 안 할 수 없기에 탄저병 예방약을 했다. 마음 같아서는 농약도 화학비료도 안주고 고추농사를 짓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농약과 비료를 돈주고 사서 뿌렸다.
 
 오늘 수확은 두 번째 하는 것으로 총 세 번까지 수확이 가능하다. 허리를 숙여 고추 따는 것이 힘들어 농협에서 앉아서 밀고 다니는 수확용 수레를 샀다. 밭의 이랑을 횡단 하니 포대가 가득 채워져서, 밭둑에 내려놓고 수레를 밀며 고추를 열심히 싸서 담았다.
 
 어느덧 해는 중천에 떠올라 고추밭에도 태양의 기운이 가득하다. 수확한 고추가 다섯 포대나 되어, 밭둑에 앉아 얼음생수로 목을 축였다. 온몸이 땀으로 젖었지만 마음은 흐뭇하고, 얼굴은 미소로 가득 찼다.      

트럭에 고추를 싣고 산길을 돌아 집에 도착하니, 십일 전에 마당에 널어놓은 진홍색 고추가 햇볕에 반짝이고 있었다. 올 여름은 비오는 날이 적고 폭염이 계속되어 고추를 말리기에 최고로 적합했다.
 
 십일동안 폭염을 견디고 태양초 고추로 등극한 고추를 비닐포대에 담으니, 수분이 없어서 그런지 무게가 절반으로 줄었다. 건 고추를 창고에 들이고, 방금 딴 고추를 검은 그물망 멍석에 부으니 산더미처럼 쌓였다. 골고루 널어 주고, 지하수를 퍼 올려 온몸의 땀을 씻어 내니, 세상의 모든 시름이 한순간에 날아갔다.
 
 일하고 먹는 아침밥상에는 된장과 풋고추,김치,된장찌개와 밥에서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있었다. 황제의 밥상과 비교할 수 없는 진미를 느끼며, 허기진 배를 채웠다.
 
마루에 앉아서 푸른 산을 바라보니 산을 스치는 바람이 일부러 인기척을 하고 지나갔다. 잠시 뒤 기와집 처마 끝에 잠자리가 날아와 살포시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강아지 백구가 짖는 소리에 놀라 날아갔다.   
 
 마른 고추를 창고에서 가져와 마루에 앉아서 꼭지를 가위로 자르니, 톡톡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간다. 튕겨 나간 꼭지가 땅바닥에 나뒹굴고, 마른 고추는 힘없이 바구니에 편안히 안착했다.
 
수북이 바구니에 꼭지가 잘린 고추가 쌓이자, 매운 기운 때문에 연거푸 재체기가 나오고, 눈물까지 흘렀다. 온갖 비바람과 폭염을 견디고 마침내 주인을 위해 산화(酸化)하는 공덕(功德)에 대한 측은지심(惻隱之心) 때문에 눈물이 나왔을 것이다.
 
 꼭지를 따 자르고 다시 포대에 담아 방앗간으로 향하니, 오늘따라 고추를 가루로 분쇄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좋은 고추가루를 만들기 위해서는 또 다른 기다림이 필요 하리라는 생각을하니 마음에 고요한 평화가 찾아왔다.
 
 한참을 기다리는 순서가 돌아와 분쇄기에 고추를 넣으니, 쉼 없는 진동을 하면서, 붉은 가루를 쏟아 낸다. 붉은 색이 정말 진하고, 매운 향이 진동하니, 고추장 담그면 맛이 일품 일 것 같았다.  가루가 어찌나 미세하던지 만지는 느낌이 정말 부러웠다.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김치를 담그려고, 소금에 절인 배추를 꺼내어 물기를 빼내고 있었다. 고추가루를 건네 주자, 양념과 고추가루와 젓갈을 섞은 후 배추와 버무려 한입 먹어 보라고 건네 주었다. 새로 담근 김치라서 그런지 잃었던 입맛이 되돌아 왔다.
 
 직접 고추를 가꾸어 수확 후 이렇게 김치까지 담아서 먹을 수 있는 것은 농촌에 사는 특권 이리라. 이것은 감사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다. 장독 뒤 커다란 나무에선 대봉 감이 영글어 가고, 들판에는 벼가 점점 익어가고 있다.
 
 이 가을에는 유난이 마음이 풍요롭고, 행복한 기운이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으니 하늘 향해 두 손 모아 감사의 기도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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