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鄭芝溶)
정지용(鄭芝溶, 1902. 5. 15 ~ 1950 납북)은 충북 옥천에서 한의사인 아버지 태국(泰國)과 어머니 정미하(鄭美河)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12세 때 송재숙(宋在淑)과 결혼했으며, 1914년 아버지의 영향으로 가톨릭에 입문했다. 옥천보통학교를 마치고 휘문의숙에 입학해서 박종화· 홍사용· 정백 등과 사귀었고, 박팔양 등과 동인지 『요람』을 펴내기도 했으며, 신석우 등과 문우회(文友會) 활동에 참가하여 이병기· 이 일· 이윤주 등의 지도를 받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선근과 함께 '학교를 잘 만드는 운동'으로 반일(半日) 수업제를 요구하는 학생대회를 열었고, 이로 인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가 박종화· 홍사용 등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났다.
1923년 4월 일본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입학했으며, 유학시절인 1926년 6월 유학생 잡지인 『학조(學潮)』에 시 「카페 프란스」 등을 발표했다. 1929년 졸업과 함께 귀국하여 이후 8·15해방 때까지 휘문의숙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했고, 독립운동가 김도태, 평론가 이헌구, 시조시인 이병기 등과 사귀었다. 1930년 김영랑과 박용철이 창간한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가했으며, 1933년 『가톨릭 청년』 편집고문으로 있으면서 이상(李箱)의 시를 세상에 알렸다. 같은 해 모더니즘 운동의 산실이었던 구인회(九人會)에 참여하여 문학 공개강좌 개최와 기관지 『시와 소설』을 간행했다.
1939년에는 『문장』의 시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켰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이화여대로 옮겨 교수 및 문과과장이 되었고,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 및 『경향신문』 주간이 되어 고정란 「여적(餘適)」과 사설을 맡아보았다. 1950년 6·25 때 납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