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당 정인보 흑백사진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1893. 5. 6 ~1950 납북)는 서울 명동에서 명문가의 외아들로 출생하였다. 유명한 학자인 이건방에게 사사했으며, 1913년 상하이로 건너가 박은식, 신규식 등과 함께 동제사를 결성하였다. 귀국 후 연희전문에서 강의하는 한편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일하며 저술활동을 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창씨개명 등을 강요하는 분위기에 저항하여 산 속으로 은둔 생활을 하였다.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 국학대학 초대 학장을 지냈다.

광복 초에 그는 「광복절 노래」를 짓기도 했다.

1945년 12월 23일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해 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구가 모스크바 3상 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46년 『조선사연구』(서울신문사)를 저술했고, 그해 2월 14일 민주의원 결성대회가 열렸으나 정인보는 여운형, 함태영, 김창숙, 조소앙 등과 함께 민주의원 의원직을 거부하였다. 그는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삼고초려로 초대 감찰위원장에 선임되었으나 김영신의 독직 사건을 두고 이승만과 갈등을 빚고 물러났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7월 31일 서울에서 공산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한동안 그해 11월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공식 사망일은 9월 7일로 북행 직후 황해도에서 폭격을 받아 타계한 것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