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문학의 창간

일본 유학시절부터 절친하였던 영랑 김윤식과 용아 박용철이 주축이 되고, 여러 문인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통해 한국 시문학사의 한 획을 그은 시문학파가 탄생되었습니다.

영랑과 용아의 만남

영랑 김윤식과 용아 박용철 유학시절 흑백사진

[ 동경 유학시절 영랑 김윤식과 용아 박용철 ]

“일본 유학시절 아오야마(靑山) 학원에서 동문수학한 영랑 김윤식과 용아 박용철은 평생을 두고 시심(詩心)을 나누는 문우(文友)가 되었습니다.”

“내가 시문학을 하게 된 것은 영랑 때문이여.” - 용아 박용철의 말

“수리의 천재로 교사의 칭찬이 자자하던 때 나는 작은 악마와도 같이 그를 꼬여내어서는 들판으로 산길로 끝없이 헤매게 만들 었다.” - 영랑 김윤식의 말

『시문학』 창간 계획

“두 문우의 시에 대한 열정은 자연스럽게 시 동인지 발간의 움직임으로 이어졌습니다.”

2월 10일이었다. 詩(시) 잡지의 출판 등의 결정적 의론을 하고 3월 하순의 상경을 約(약)하였다.- 1929. 3. 10. 용아 박용철의 일기

잡지의 일은 수월스럽게 되는 듯도 하였으나 [詩文學(시문학)]이란 명명을 하였을 뿐 27일을 제1차 기일로 정해 보았으나 실행할 아무 재조도 없었다.- <1929. 12. 23. 용아 박용철의 일기 > 영랑 김윤식의 말

문우들의 동참

“동인지의 발간을 위해 뜻을 함께 하는 문우들이 합류하고, 『시문학』지의 창간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梁柱東(양주동)군이 [文藝公論(문예공론)]을 평양서 발간한다고 말하면 일에 방해가 될 듯싶네. 하여간 芝溶(지용), 樹洲(수주) 중 得其一(득기일)이면 시작하지. 劉玄德(유현덕)이가 伏龍(복룡), 鳳雛(봉추) 중 得其一이면 天下可定 (천하가정)이라더니 나는 지용이가 더 좋으이. 잡지 [愛誦(애송)] 그대로 따다 해도 좋겠는데 단방에 ‘近代風景 (근대풍경)’의 무수식도 앗사리하지마는 誌名(지명), 丹弓(단궁), 丹鳥(단조), 玄燈(현등), 詩嶺(시령), 우리말 단어가 좋은 게 있으면 좋겠는데….- 1929. 3. 26. 용아 박용철이 김영랑에게 보낸 편지

『시문학』 의 첫 선

시문학파 동인 창립 기념 단체 흑백사진

[ 시문학 동인 창립 기념사진, 1929년 ]

앞줄 왼쪽부터 김영랑, 정인보, 변영로, 뒷줄 왼쪽부터 이하윤, 박용철, 정지용

“1930년 봄, 순수시 동인지 『시문학』이 세상에 드디어 첫 선을 보였습니다.”

프로 詩(시)니 無産文學(무산문학)이니 세상을 시끄럽고 하던 그때 말하자면 조선시의 정통을 찾고 발전을 바라야 신흥 조선문학이 세계적 수준에까지라는 理想(이상)이 純粹詩誌(순수시지)를 계획케 하였던 것이니 昭和(소화) 4년 秋(추)에 상경하여 芝溶(지용)과 합작하고 창간호 나올 임시에 조선적 大事件(대사건)이 폭발하여 중지하고 翌春(익춘)에 창간호는 나왔었다.- 김영랑, 『박용철 전집』(1939)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