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백제여, 백제의 혼이여, 월남사지 삼층석탑이여 - 유헌
- 작성일
- 2016.06.16 21:47
- 등록자
- 유헌
- 조회수
- 1108
아, 백제여, 백제의 혼이여,
월남사지 삼층석탑이여
유헌
먹장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사자봉이 사라지고 있다. 천둥소리가 급하게 경포대 계곡을 굴러 내려온다. 석공의 망치소리가 빚어낸 돌들이 산산조각이 나 뒹군다. 정지한 듯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노을처럼 물든 사내의 눈빛이 허공에 닿자 사라졌던 봉우리들이 나타난다. 모두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다시 월출산 천황봉 정상에 흰 구름이 걸리고 하늘은 퍼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천 년 전 그날을 나름 상상해봤다. 아마 그날은 천둥번개가 월남리 뒷산을 흔들고 폭풍우에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빗물은 폭포수가 되어 마을 안길을 덮쳤을 것이다. 몇 안 되는 주민들은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다. 하늘을 쳐다보며 빌고 또 빌었을지도 모른다.
2016년 초여름, 나는 그 긴 세월 동안 온갖 풍상을 온몸으로 견디며 슬픔을 딛고 우뚝 솟은 전설의 월남사지 삼층 석탑을 찾아간다.
월남사지 삼층석탑은 13번 국도 찻길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다. 강진군 성전면 월남시외버스매표소에서 도보로 10여분 거리에 있으니 말이다. 월남리에는 군내버스가 하루 6회 오가고 광주방향의 시외 직행버스도 7회나 왕복하고 있다.
석탑으로 가는 길은 이미 여름이었다. 마을 입구 녹차 밭의 찻잎들 더욱 짙어졌고 마늘종을 뽑는 아낙의 손길도 분주해 보였다. 668미터의 사자봉과 744미터의 향로봉을 좌우에 거느린 천황봉을 바라보며 걷는다. 전라남도교통연수원을 지나자 곧장 월남 마을회관이 나온다. 경포대 방향으로 100여 미터 더 걸으니 월남사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월남사지란 월남사가 있었던 터다. 월남사는 고려 때 승려 진각국사 혜심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최근 발굴 현장에서 백제와 통일신라시대 유물까지 다양하게 출토되고 있어 월남사를 혜심이 중창했던지 아니면 백제시대에 이미 사찰이 있었을 것이란 반론도 만만치 않다. 특히 백제 기와류는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에 유행하던 양식이라고 하니까 월남사지의 역사 또한 15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할 수도 있겠다
.
삼층석탑을 품었던 월남사는 언제 폐찰(廢刹)된 것일까. 정유재란 때 무위사를 제외하고 인근 사찰들이 다 불에 탔다고 『무위사 사적』에 기록돼 있다고는 하지만 조선 영조 때 신경준의 『가람고』에 월남사가 언급돼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까지 어떤 형태로든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그 시대 월남사(月南寺)와는 규모면에서 비할 바가 못 되겠지만 지금도 그 자리에 월남사라는 사찰이 있긴 하다. 절 입구에 들어서니 잘 생긴 수문장 같은 삼층 석탑이 나를 맞는다. 고색창연하다는 말은 이런 월남사지 삼층석탑을 두고 한 말일까. 한눈에 봐도 긴 세월이 읽힌다. 그리고 잘 생겼다. 멋지게, 품위 있게 나이를 먹어 가고 있었다. 오랜 시간 바람에 깎이고 햇살에 그을린 구릿빛 모습이 오히려 아름다워 보였다. 추녀는 또 어떤가. 넓게 수평의 직선을 그리다가 끝에서 가볍게 들려 있다. 나는 이보다 더 아름답고 균형 잡힌 탑을 본적이 없다.
월남사지 탑은 높이가 7.4미터이니까 3층 석탑치고는 높은 편이다. 탑이 양 옆 보다는 위 아래로 많이 솟아 있다. 기단부 갑석 또한 위쪽의 옥개석 보다 좁아 자칫 불안해 보일 수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탑신석의 비율 때문일 것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일정 비율로 짧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대석이 두꺼운 기단 하대석과 함께 대형 판석 하나로 이루어져 있어 안정감이 더 있어 보이는 지도 모르겠다.
인근 무위사 삼층석탑은 신라계 탑으로 알려져 있다. 월남사지 석탑은 946년에 지어진 무위사 탑에 비해 기단부가 매우 좁다. 이처럼 두 탑은 거의 동시대에 조각됐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모양은 확연히 다르다. 월남사지 탑은 백제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기단 및 탑신의 각 층을 별도의 돌로 조성한 것이나 좁은 기단, 옥개받침 형식 등 백제계 석탑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는 것을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강진군 성전면 월남마을 이홍교 이장에 따르면 월남사지 삼층석탑 옆에 또 하나의 석탑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모두 고인이 되었지만 월남마을에 대대로 살아온 나이 드신 분들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월남사지 인근 이범교씨 댁 장독대에 석탑의 지붕돌인 옥개석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돌을 고물상이 수집해가는 걸 마을 주민 이효근씨가 목격하고 호통을 쳐 다시 되돌려 받았다고 한다. 그 옥개석은 지금 월남마을회관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이 옥개석이 전형적인 신라 탑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의 월남사 주지 법화 스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다. 월남사지 삼층석탑에서 서쪽으로 10여 미터 지점에서 석탑의 기초 부분으로 추정되는 탑 터를 유물 발굴 당시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월남사 법당 앞에는 백제계 양식과 신라계 양식의 탑 두 개가 공존했다는 얘기가 된다. 조화와 화합의 상징으로 말이다.
월남사지 삼층석탑의 처음 명칭은 월남사지 모전석탑이었다. 그러던 것이 2002년 문화재청에 의하여 '월남사지 삼층석탑'으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모전석탑이란 바위를 벽돌처럼 깎아 만든 돌로 쌓아올린 탑을 말한다. 그런데 내가 본 월남사지 석탑은 어디를 봐도 벽돌탑의 모습은 아니었다. 옥개받침도 1층과 2층은 3단, 3층은 2단으로 변화를 주고 있다. 옥개석을 받치고 있는 돌들도 특별했다. 무 자르듯 두 조각 혹은 네 조각으로 잘라낸 게 아니라 길게 혹은 짧게 층마다 돌의 길이와 개수를 달리하며 짜 맞추어 변화를 주고 있었다. 그런데도 천년을 떠받치고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월남사지 삼층석탑은 정확히 언제 세워졌을까. 여러 발굴조사 결과 등을 종합해보면 월남사의 창건연대가 지금까지 알려진 고려 중기가 아닐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이미 백제시대에 창건된 고찰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월남사지 석탑이 세워진 연대도 6~7세기경으로 올라갈 수도 있지 않겠는가. 월남사 주지 법화 스님은 “문화재청에서 지금의 월남사를 해체하고 발굴에 들어가면 법당은 임시로 석탑 우측에 있는 큰 소나무 아래로 옮겨갈 것”이라고 말한다. 필자가 다시 찾은 6월 14일 실제로 월남사를 해체하는 포클레인 소리가 요란했다. 월남사지 만여 평 중 900여 평을 차지하고 있는 지금의 월남사가 월남사지의 중심권역임을 감안했을 때 발굴과정에서 천년의 비밀을 풀 열쇠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내년쯤엔 문화재청에서 현재의 석탑 해체 보수 계획까지 있다고 하니까 이번 기회에 월남사와 월남사지 삼층 석탑에 대한 비밀의 문이 꼭 열렸으면 좋겠다.
삼층석탑은 보면 볼수록 신비했다. 나는 한동안 탑을 떠나지 못했다. 어디선가 전설 속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월남사 석탑을 조각하게 된 석공에게는 아름다운 부인이 있었다. 석공은 불사가 끝나기 전까지는 찾아오지 말라는 말을 부인에게 남기고 먼 길을 떠난다. 그런데 탑이 거의 완성될 즈음에 아내가 찾아와 남편의 이름을 부르고 만다. 석공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하늘에서는 천둥 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진다. 석탑은 산산조각이 나고 아내는 그만 돌로 변해버리고...,’석공은 돌이 된 부인을 끌어안고 월출산 천황봉을 바라보며 산짐승처럼 울부짖었을 것이다. 한참 후에 탑을 다시 쌓으려고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쓸 만한 돌이 없자 생각 끝에 돌로 변해 버린 아내를 쪼아 다시 탑을 완성했다고 한다. 월남사지 삼층석탑은 이처럼 슬프고도 안타까운 이야기를 가슴에 묻어 두고 있는 탑이다.
월남사지 삼층석탑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섰다. 바람이 지나간다. 탑의 틈새 어딘가에서 사랑하는 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석탑 앞의 비문을 가만히 읊조려 본다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이름을 조용히 입속에 되뇌며 석탑에 기원해 보길. 기다림은 더 아름답고 위대한 것을 남기는 법이다’
길손이여, 경포대 계곡도 좋고 10만평 광활한 차밭도 좋지만 이곳 삼층석탑에도 눈길 한번 주시라. 잠시 들러 역사의 숨결을 느껴 보시라. 폐사지(廢寺址)에 버려진 듯 서 있는 것도 서러운데 푸대접에 외면까지 받는다면 천 년을 버텨온 세월이 너무 억울하지 않겠는가. 그 긴 시간을 증언할 보물 298호 월남사지 석탑과 보물 313호 진각국사비가 바로 여기에 있다.
월남사지 석탑을 떠나기 전에 탑 주변을 다시 한 바퀴 돌아봤다. 석공은 죽어 자연의 일부가 되었지만 면면히 내려오는 백제의 정신은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시대가 바뀌고 이 땅의 주인도 바뀌었지만 백제인의 혼만은 월남사지 삼층 석탑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광야에 홀로 우뚝 선 의인처럼 이 땅 남도를 그렇게 지키고 있었다.
시인, 수필가, 전)목포MBC 보도제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