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서정시인의 거목이며 시문학파 동인이었던영랑 김윤식

영랑 김윤식 선생(1903~1950)은 남도의 사투리를 음악성있는 시어로 표현한 서정시인이자 단 한줄도 친일문장을 쓰지 않은 민족시인으로 1903년 1월 16일 이곳에서 김종호의 2남 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에는 채준으로 불렀으나 윤식으로 개명하였으며 영랑은 아호인데 문단활동시에는 주로 이 아호를 사용했다.

영랑 선생은 1950년 9월 29일 작고하기까지 주옥같은 시 80여편을 발표하였는데 1930년 3월 창간한 ‘시문학’지를 중심으로 박용철, 정지용 등과 더불어 현대시의 새 지평을 열었다. 선생은 생애 87편의 시를 남겼으며 그중 60여편이 일제강점기에 창씨개명 등을 거부하고 이곳 영랑생가에서 쓴 것이다.

영랑의 일대기 애니메이션

영랑의 발자취

  • 1903년 : 강진의 오백석지가 부유한 김종호의 2남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강진 보통학교(현 강진 중앙초등학교)와 휘문의숙을 거쳐 동경 청산학원 영문과 중퇴
  • 1919년 : 휘문의숙 재학 당시 독립선언문을 구두 안창에 숨겨 고향에 내려와 강진의 독립운동을 주도 하다가 검거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 하였다
  • 1920년 : 동경 유학시절 박열(학명가이자 무정부주의자)과 같은 방에서 하숙하다가
  • 1923년 : 9월 관동 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 1919년 : 3.1운동 직후 김현구, 차부진, 김길수등과 강진에서 청구 라는 학문 동인지를 발간
  • 1933년 : 동경유학 때 사귄 박용철과 함께 시문학 동인지 창간을 주도하였다.
  • 1945년 : 해방 후 대한독립 촉성회 강진군 단장으로 활약
  • 1948년 :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
  • 1949년 : 8월부터 약 7개월간 공보처 출판국장을 역임
  • 1950년 : 6.25전쟁시 복부에 파편을 맞고 쓰러저 9월 29일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영랑의 작품세계

「청구」라는 문학 동인지로 출발하였으나 결국 「시문학」 동인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영랑의 시는 순수한 탐미주의(耽美主義)적 문학관에 입각하여 섬세하면서도 영롱한 정서를 잘 다듬고 깎아낸 언어와 시형(詩型)에 담은 대표적인 순수 서정시다. 소월이 북도(北道)의 투박한 사투리로 독특한 가락을 표현했다면, 영랑은 남도의 곱살스러운 방언을 그의 시에 담았다. 그의 시 가운데는 4행시가 많다. 이 역시 민요의 형식에 가깝게 표현하려고 한 의도로 볼 수 있다. 섬세한 정서, 언어의 조탁, 미묘한 음악성은 우리 순수시의 위치를 확고하게 만들어 주었다.

휘문고 시절에는 축구선수를 지낼 정도로 운동을 즐겨했으며, 본가에 정구장을 마련해 놓고 운동을 했던 영랑은 또한 동서양의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아악에 정통하고 북(鼓) 으로 이름이 알려지고 거문고에도 심취하는 등 이러한 음악에 심취했던 것이 뒷날 그의 시세계의 독특한 언어에 표현되어 나타나기도 했던 것 같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작품 감상
  • 동백닙에 빛나는 마음(데뷔작)
  •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시문학」 창간호1930.3 , 「영랑시선」1949)
  • 내마음 고요히 고흔봄 길우에(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시문학」 3호 1931)
  • 내 마음을 아실 이(「시문학」 3호 1931)
  • 모란이 피기 까지는(「문학3호」 1935 ,「영랑시집」 1935)
  • 북 (「영랑시집」1935)
  • 두견 (「영랑시집」 1935)
  • 오월(五月 「문장6호」 1937)
  • 독을 차고 (「문장」 10호 1939)
  • 거문고 (「조광」 1939)
  • 춘향 (「문장」 18호 1940,7)
  •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오메 단풍 들것네)
  • 가늘한 내음
  • 마당앞 맑은 새암은
  • 아파 누워 혼자

영랑생가

우리나라 서정시인의 거목이며 시문학파 동인이었던 영랑 김윤식이 1903년 출생하여 1948년 9월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 하기까지 46년을 살던 곳으로 영랑의 시적 소재의 산실이다. 현재의 영랑생가는 선생이 이주하고 그 후 몇차례 전매 되면서 원형이 크게 훼손 되었던 것을 1985년 강진군이 도비지원을 받아 다시 사들여 연차공사로 복원한 것이다. 안채는 일부 변형되었던 것을 1992년에 원형으로 보수하였고 ,문간채는 철거되었던 것을 영랑가족들의 고증을 얻어 1993년에 복원하였다.

  • 소재지 :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 탑동
  • 지정번호 : 국가지정중요민속문화재 제252호
  • 지정일 : 2007년 10월 12일
  • 규모 : 생가일원(4,422㎥)
  • 건립년도 : 1906년
  • 탐방시간 : 09:00~17:00
  • 이용료 : 없음

생가로 들어 가는 길엔 구부러진 돌담(시; 내마음 고요히 고흔봄 길우에)이 있고, 입구넓은 잔디밭에 서 있는「모란이 피기까지는」의 돌 시비를 지나 문간채 대문을 들어서면안채가 나온다. 안채 왼쪽으로 옛날 돌로 쌓아진 우물(시; 마당 앞 맑은 새암)이 제 모습 그대로 하고 있으며. 안채 오른쪽으로 장독대와 감나무(시; 오메 단풍 들 것네-원제는 누이야 내 마음을 보아라)와 모란꽃밭(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있다. 꽃밭에서 더 오른쪽으로 가면 북을 두들기며 시를 읊고 쓰던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는데 그 앞의 은행나무(시; 아파 누워 혼자)는 영랑이 19살에 심었다고 한다. 안채 뒷편 언덕엔 대나무숲과 동백나무들이 있는데 영랑의 데뷔작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의 모태인 것이다.

김영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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